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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샌프란시스코 47 의 인격과 신의를 고양하는 수양단체로 활동하였고  단원들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의  일선에 나섰다. 흥사단은 1915년 단소를 로스앤젤 레스로 옮기면서 샌프란시스코를 떠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민족독립운동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것 중 가장 오래 기억될  한국독립운동은 1908년 3월 23일 월요일 페리부두 에서 거행된 장인환·전명운(1884~1947)의 스티븐 스 처단의거이다. 이 일로 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는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상항한인공동회를 결성하 고 두 의사의 재판을 돕는데 앞장섰다. 전 미주 한인 들은 온 힘을 다해 의연금으로 지원하였고, 심지어  일본과 국내에서까지 의연금을 보냈다. 장인환·전명 운의거는 샌프란시스코란 지역적 의거로 끝나지 않 고 전 미주 한인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힘의 결집 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실은 국민회를 탄생시켰다.  샌프란시스코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와  자체의 이름을 바꾼 대한인국민회총회를 중심으로  한인 동포들의 권익을 보호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 와 파리강화회의 한인 대표 파견활동, 국내 3 · 1운동  발발 소식을 들은 직후에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를 향해 선전활동을 개시했는데, 독립의연, 21례금,  애국금 등의 명목으로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왔다.  해방 직전인 1945년 4월 미국의 주도로 열린 샌프 란시스코회의(1945.4.25.~6.26)는 재미 한인들에게  가장 주목 받은 국제대회였다. 그러나 한인 대표 파 견을 둘러싸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한시대를 단 장으로 한 해외한족대표단을 구성했고 대한민 국 임 시정부는 이승만을 단장으로 한 임시정부대표단을  구성해 서로 독자활동을 펼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이승만은 얄타밀약설을 제기하여 스 스로 국제정치활동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미국 본토 입국의 관문인 샌프란시스코는 해방  이전 재미 한인들에게 미국 첫 발을 대딛는 곳으로  가장 마음 설레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도시이자,  1938년 로스앤젤레스로 거점을 옮길 때까지 한국독 립운동의 요람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도시이다.  ➌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 의거 보도 기사(샌프란 시스코 크로니클, 1908.3.24) ➍ 스티븐스 처단 의거의 주역 장인환(오른쪽)과 전명운 ➍ ➌ 필자 홍선표 한양대학교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학교 연구교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대한민국 공군 역사자 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공·저서로 『서재필 개화 독립 민주의 삶』, 『자 주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재미한인의 꿈과 도전』, 『대한민국 국방사』(공 저), 『Koreans in Central Europe』(공저), 『3 · 1운동과 국제사회』 (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