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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2025년 1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독립운동의 목표와 방법론 재조명’ 이승만은 위 임통치 청원 이 가진 정치 적 ‘위험성’을 제대로 인식 하지 못했다. 3·1운동 소식 이 미주에 전 해진 이후에 도 기자회견 을 통해 「한국 위임통치청원 서」를 공개하 고 이를 언론 을 통해 널리 알렸다. 정한경 또한 위임통치안을 『뉴 욕타임즈』에 기고했으며 나아가 『아시아』 5월호에 자치설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이승만과 정한경을 외교 독립운동의 ‘대표’로 선출 한 재미 한인들의 의사와는 무관했으며, 당시 미주 한인들이 품었던 독립에 대한 염원을 제대로 반영하 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탄핵된 임시정부의 대통령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수립된 모든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급에 해당하는 직위로 추대했다. 미국 정·관계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쌓아 올린 그 의 명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 원이 상하이에 전해지면서 그는 곧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열린 제1 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그의 국무총리 선임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제기되었다. 신채호(申 采浩)는 이승만이 위임통치 및 자치론을 제안했다며 이를 문제 삼았고, 현순(玄楯)도 이승만에게 위임통 치 청원이 ‘우리의 활동에 무한한 장애가 된다’며 만 일 사실이라면 이승만을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임시정부들의 통합이 논의되고 우여곡절 끝에 1919년 9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면 서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한인 대표의 파리행을 보도한 The Japan Advertiser 1919년 1월 22일자 기사 1933년 1월 임시정부 특명전권대사로 외교활동을 위해 스위 스 제네바로 간 이승만(이승만기념사업회 제공) 청년시절의 이승만 장년기의 이승만 (이상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