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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2024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대한제국기 구국계몽운동의 재조명’ 무금 수합소’가 결성되어 ‘대구단연상채소(大邱斷煙 償債所)’와 유기적인 연결 속에 국채보상운동을 벌 였다. 또 각 군에서는 국채보상을 위한 보상소를 설 립하고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키워나갔다. ● 애국계몽운동 단체 지방지회가 조직되다 대구지역 애국계몽운동은 1908년 3월 대한협회 대구지회와 서울에서 교남교육회가 설립되면서 본 격화되었다. 대한협회 대구지회는 1908년 3월 설 립되어 교육진흥과 실업장려를 목적으로 활동하였 고, 교남교육회는 1908년 3월 서울에서 활동하던 영남 출신의 인사들이 상호간의 친목과 출신 지역 의 계몽사상 보급을 위해 설립하여 신교육의 보급 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대한협회 대구지회나 교남교육회 회원들은 그 성 향이 매우 관료 지향적이었다. 특히 대한협회 대구 지회의 임원 및 회원 중 많은 사람들이 초기부터 관 료로 임명되거나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식민지 통 치기구에 종사하는 관리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교남교육회의 경우에도 거의 비슷한 현상으로 나타 나고 있어 애국계몽운동이 가진 한계를 보여 주 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면서 설립된 애국계몽 운동 단체가 달성친목회였다. 1908년 9월 5일 결성된 달성친목회는 이근우 · 김 용선 등 대구 출신의 계몽적 지식인들이 조직하였 다. 달성친목회 회원들은 대구 지역의 자본가 세력 인 부호들의 후원 속에 신사상과 신문물을 희구하며 성장한 지식인이었다. 달성친목회는 교남교육회와 연결되어 대구를 중 심으로 청년의 교육진흥과 실업장려를 표방하며 활 동하였지만, 실제로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활동하였 다. 나아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항일독립운 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의 성격까지 띠게 되어 1910년대 독립운동 단체 조선국권회복단 · 광복회로 발전하였다. 2. 대구지역 애국계몽운동의 한계 ● 대구광학회와 대구광문사가 대립하다 1906년 2월 관찰사 이근호는 교체되어 서울로 가 『해조신문』에 실린 우현서루 관련 기사 「우현미사(友현美事)」보도기사(1908.4.22)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대구광문사 창설 관련   기사「광문창설」(1906.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