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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2024년 1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부부 독립운동가의 삶을 다시 본다 앉아서 두고 볼 수가 없었던 도산은 나라를 새롭게 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1907년 귀국하게 되었다. 도 산이 국내에 들어가 ‘신민회’를 조직하는 등 국권회 복운동을 전개할 당시 이혜련은 어린 필립을 데리고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도산, 이혜련과 재회 일제에 의해 국권이 빼앗기기 전 안창호는 국내를 탈출하여,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그 리고 도산은 유럽을 거쳐 영국 글래스고에서 칼레도 니아호를 타고 1911년 9월 3일 미국 뉴욕항에 입항 하였다. 미국을 떠난 지 4년 만에 이혜련과 아들을 다시 만나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 수가 있게 되었 던 것이다. 1905년에 태어난 아들 안필립은 그때 이 미 여섯 살이 되어 있었다. 도산이 미국에 돌아온 지 1년쯤 뒤인 1912년 7 월 5일 둘째 아들 필선이 태어났다. 첫째 딸 수산은 1915년에, 그리고 둘째 딸 수라는 1917년에 태어났 다. 남편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것만으로 이혜련 은 너무나 행복했다. 남편이 돌아왔다고 이혜련이 오로지 홀로 감당해 온 모든 일들이 줄어들지는 않 았다. 아니 도산이 돌아온 뒤 이혜련의 일이 두 배, 세 배로 늘어났다. 왜냐하면 도산을 찾아오는 동포 들이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집은 독립 운동을 논의하는 곳이며, 모든 한인의 모임 장소였 다. 일요일이면 모든 사람이 예배를 마치고, 이혜련 의 집으로 몰려왔다. 그녀는 집에 오는 동포들을 위 해 밥뿐만 아니라 김치도 충분히 준비해 두었다. 미주 동포들은 도산을 충실한 가장으로 편하게 살 게 해 주지 않았다. 1912년 1월부터 도산은 동포들 이 사는 모든 곳을 찾아다녔 다. 샌프란시스 코에서 캘리포 니아 북부 스탁 톤, 새크라멘토 로, 다시 샌프 란시스코에서 캘리포니아 중 부의 다뉴바로, 다뉴바에서 로 스앤젤레스로, 가 족 들 과 함 께 지낼 수 있었지만 거의 집에 있지 않다. 그러다 가 1917년 8월부터 1918년 8월까지 1년 동안 멕시코 를 순방하게 되었다. 멕시코 혁명으로 인해 위험해 진 유카탄의 메리다를 방문할 때, 이혜련은 남편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고생이 많았다. 미국에서 도산 가족은 1914년부터 1935년까 지 로스앤젤레스 노스 피게로아 스트리트(North Figueroa Street) 106번지에 살았다. 이 집은 일반 가정집이기도 했지만, 도산이 창설한 ‘흥사단’의 단 소이기도 했다. 흥사단소에서 큰딸 수산, 둘째 딸 수 라, 막내아들 필영이 태어나고 자랐다. 그런데 흥사 단소를 사우스 카탈리나 스트리트(South Catalina Street) 3421번지로 옮기면서 도산의 가족들도 이사 를 갔다. 도산은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동포사회를 돌 보고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있을 당시, 이혜련도 남 편에 못지않게 한인사회를 위한 일을 하고 있었다. 도산 부부와 가족사진(1917년경). 안 필립, 안필선, 안수산, 안수라(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