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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2023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78주년 특집 일제 말기 상황과 국내외 한국인의 대응 할 때까지 대일항전에서 활약했다. 이와 함께 1945년부터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 전략첩보기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와 합 작해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했다. 이는 한국광복군 대 원들에게 OSS 특수훈련을 실시하고 훈련받은 대원 을 국내로 진입해 적후방 공작을 전개한다는 계획으 로서 일명 ‘독수리작전(The Eagle Project)’으로 불렸 다. 광복군 대원에 대한 OSS훈련은 1945년 5월부터 3개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제1기생 훈련이 완료되 자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1945년 8월 7일 시안 (西安) 의 광복군 2지대 본부에서 OSS총책임자 도노반 소장 을 만나 국내진입작전을 협의하고 한미공동작전 실 행을 공식 선언했다. 다만 한미공동작전은 8월 6일 원폭 투하와 8월 15일 일제의 항복으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연합군인 영국군에 이어 미군과도 합작해 공동작전을 모색하며 활동 범위와 합작대상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연합군과의 공동 대일항전을 모색하는 한편, 연합국 사이에서 개최되는 국제회의 를 향해서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가운데 1943년 11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미 · 영 · 중 3개국 영수가 만나 회의를 개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 석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 5명이 1943년 7월 26일 장제스(蔣介石)를 찾아가 면담하고, 카이로에서 전후문제를 협의할 때 한국이 독립될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부탁했다. 장제스는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고, 그 결과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자 유 독립이 보장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일 하게 연합국으로부터 자유 독립을 보장받은 것은 한 국뿐이었다. 해방과 관내 한인의 귀환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으로 한국은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했다. 임시정부는 한국 광복군 국내정진대를 편성하고, OSS와 함께 8월 18 일 국내로 파견하여 이들은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 다. 아쉽게도 국내정진대는 일본군의 저항으로 인해 다시 돌아와야 했지만,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 세력 가운데 가장 먼저 국내로 진입을 시도한 이범석 · 안춘생 · 노태준 등 광복군 2지대 간부들과 기념촬영한 미 군 OSS 대원들(1945.9.30) 미군과 함께 훈련중인 한국광복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