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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2023년 4월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회는 1921년 3월 22일 하와이지방총회가 자체를 해 소하여 대한인교민단으로 바꾸어 본회에서 떨어져  나가자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1923년 1월 헌장을 개정해 중앙총 회제도를 폐지하고 ‘대한인국민회총회’란 이름으로  바꾸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던 대한인국민회총회는  1936년 7월 4~5일 개최한 특별대의회에서 재미 한 인들의 인구 중 삼분의 일 이상이 모여 있는 로스앤 젤레스로 본부를 옮기로 하고 총회관을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1938년 4월 17일 로스앤젤레스 의 1368 W 제퍼슨스트리트에 신축한 대한인국 민회 총회관 낙성식을 거행하여 오랜 세월의 샌프시스코 시대를 마감했다.     상항한인감리교회와 흥사단 기독교 신앙을 가진 샌프란시스코의 한국인들은  1903년부터 개인 집에서 가정 예배를 통해 신앙생 활을 꾸리다 1905년 7월 미국 북감리교회의 도움을  받아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상항한인감리교회 를 시작했다. 상항한인감리교회는 샌프란시코 한인 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위한 영적 공동체였지만, 여 기에 머물지 않고 민족운동의 요람이자 고향의 향수 를 달래주는 마음의 안식처였고, 청년운동과 국어학 교 설립을 통해 한인 청년들과 2세들에게 민족의식 을 고취하는 요람으로 활동했다. 미국이 일본과 태 평양전쟁을 개시한 1942년부터는 미군에 참전한 재 미 한인 2세 청년들을 위한 안전과 미국의 전쟁 승리 를 기원하고 돕는 중심지로 활동했다.    상항한인감리교회는 미국인 교회를 빌리거나 대 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관에서 예배를 보다 1930 년 6월 1일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 가까운  1123 파웰스트리트에 교회를 신축했다. 당시 교인 들은 100여 명에 불과했는데 이런 가운데 상항한인 감리교회가 교회 건물을 신축할 수 있었던 것은 미 국 남감리교 선교부의 지원 외 오클랜드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각처 한인들의 자발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운동 단체 외 샌프란시스코에는 안창호가 중 심이 되어 1913년 5월 13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관에서 흥사단이 창립되었다. 흥사단은 단원들 중앙총회 제1회 대표원 의회에 참가한 안창호(왼쪽 세번째)를 비 롯한 대한인국민회 대표원들(1913년, 한국학 중앙연구원 제공). 1916년 흥사단 연례대회 장면. 앞줄 가운데 안창호, 오른쪽이 안 창호 부인 이혜련 여사이다. 건물 중앙에 흥사단의 영어 약자인  YKA(Young Korean Academy)와 그 오른쪽에 한문으로 ‘興士 團’이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