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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2023년 3월 Special Theme 국민대표회의 100주년! 민족운동 세력의 통합과 혁신을 도모하다 창조파가 신정부를 수립하자 각지에서 경고와 비 난이 빗발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원 포 고로 윤해와 신숙을 모반자로 낙인찍었다. 그리고 북간도에서 35명, 길림성에서 22명, 서간도에서 39 명이 연서로 성명서를 발표하여 신정부의 수립이 절 대 불가함을 경고하였다. 고문으로 추대된 독립신문 의 주필 박은식도 이를 비난하였다. 김혁과 김홍일 은 국민위원을 탈퇴하였다. 심지어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도 개조파와 타협하여 새로운 통일전선적 한국 독립당의 설치를 지시하였기에 신정부의 수립을 달 가워하지 않았다. 국민위원회의 정부 수립과 한국독립당 창당 활동 국민위원회의 수립 후 약 20명의 국민위원들은 상 해 숭산로(崇山路) 윤해(尹海)의 집에 모여 국민위원 회의 본부를 러시아령으로 이전하기로 하되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북경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것의 협의를 위해 오창환, 방원성, 김우희(이충모) 가 연해주에 가서 코민테른의 동방부의 담당자와 협 의하였다. 그 결과 코민테른 동방부 간부 보이딘 스 키는 8월 7일 블라디보스톡 책임자 파인버그에게 훈 령을 보내 국민위원들을 블라디보스톡으로 불러들 여 협상하게 하였다. 8월 20일 윤해와 신숙, 도인권 과 김규식 등 30여 명의 국민위원들이 노르웨이 상 선을 타고 상해를 떠나 30일 경 블라디보스톡에 도 착하였다. 국민위원회는 1923년 9월 코민테른과의 협상자 를 김규식, 신숙, 이청천, 윤해, 원세훈 5인으로 선정 하고, 코민테른 동방부의 대표이자 고려총국 의장 인 파인버그, 고려총국 위원 한명세·이동휘 등과 협 의하여 정부의 수립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 동방부와 고려총국은 민족통일전선기관의 창설을 요구하였다. 이에 국민위원들은 국민위원회를 민족 통일전선기관으로 운영하기를 희망하였으나, 결국 동방부와 고려총국의 제안을 수용하여 국민위원회 를 한국독립당으로 변경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국민위원회를 한국독립당으로 변경하기 위해서는 총회를 개최해야 했으나, 정족수가 채워지 ➎ 국민위원회 비서장 원세훈 ➏ 블라디보스톡에 있었던 개척리 거리 ➏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