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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45 전국적인 만세 시위와 일제의 폭력 진압 • 사천 학살 사건 (3월 3일) : 목사 한예헌과 천도교 교구장 등의 주도로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헌병대는 무차별 총 격하였고 이 때 73명이 학살당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시위를 계속하여 헌병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헌병 2명을 사살하 였다. 또한 3월 4일에는 약 3천 명의 군중이 사천시장 방면으로 시위 행진을 벌였다. 헌병 소장 사토와 친일 헌병 보조원들 이 미리 숨어 있다가 행진하는 시위대에게 아무런 경고도 없이 총을 쏴 참가자 수십 명이 죽었다. • 맹산학살사건(3월 6일) : 3월 6일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가 시작되어 3월 9일에도 일어나 헌병대의 철수를 요구하자 시위대를 헌병대 구내에 몰아넣고 일본군이 집중 조준사격으로 54명이 즉사, 13명이 부상을 입었다. • 곽산 학살 사건 (3월 6일) : 교회를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일어나 수천 명이 이에 참가하자 일제는 군중에 무차별 총격 을 가하여 수천 명을 처참하게 죽였다. 독립운동가 박지협이 주동자로 지목되어 체포된 뒤 사살 당하였고 체포된 시위군 중 100여 명 가운데 50여 명이 잔인한 고문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 삼진 의거 (3월 28일, 4월 3일) : 삼진 의거는 두 차례에 걸쳐 창원 일대에서 일어난 연합 대시위였다. 서울 시위에 참 가하였던 변상태가 이곳에 돌아와 진전, 진북, 진동면의 3개 면에서 인사들을 모아 일으켰다. 3천여 명의 비무장 시위대가 일본 헌병대와 충돌하여 5명이 목숨을 잃었고 11명이 부상당하였다. • 천안 아우내 만세 운동 (4월 1일) :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3천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른 만세 운동으로 교회 학 교 교사 김구응의 주도로 지역 주민,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독립 선언문을 발표한 김구응과 그의 어머니 최씨가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으며 19명이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죽었다.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당하거나 투 옥되었다. • 제암리 학살 사건 (4월 15일) : 3월 말~4월 초에 수원 제암리에서 열린 장날에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만세 운동을 무 력으로 진압하던 일제는 4월 15일 제암리교회에 성인 남자들을 모두 가둬 놓고 불을 질렀고 이 때 수십 명이 살상되었다. 이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져 평화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하는 일제를 거세게 비판하는 세계 여론이 생겨났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자 유교계 역시 대규모 항일항쟁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심산 김창숙 등 유림 대표 137명은 곧 바로 우리나라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독립청원서를 작성·서명한 뒤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다. 이를 파리장서운동이라 한다. 이는 경술국치 이후 유림세력들이 펼친 가장 조직적인 항일 독립항쟁 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독립청원서 작성에 참여한 수많은 유림들이 일 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파리장서운동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