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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이승만의 외교독립론과 외교독립운동 45 다. 윤병구는 이승만과 함께 오이스터베이에서 루스 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이승만은 ‘하와이 8천 한인 의 대표’로 하와이 교민의 청원서를 전달하며 한국 의 독립을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만 30세에 불과한 이승만이 미국의 상원의원, 국무장관, 대통령 등을 만나 한국의 독립문제를 청원·협상했다는 것은 그 의 자랑이 되었다. 또한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 트지』와 같은 미국 신문과 국내의 『황성신문』 『매일 신보』에 이승만의 외교활동이 소개되었다. 이승만은 “한국인민의 대표자요 독립주권의 보존자요 애국 열 성의 의기남자요 청년지사”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막 외교 무대에 발을 들여놓은 이승만 은 그 이면을 보지 못했다. 루즈벨트와 이승만이 만 난 때는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어 한국 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미국이 정식 인정한 상태 였다. 루스벨트는 일본과의 밀약을 덮기 위해 무명의 한국 청년들을 만났고, 청원서를 주미 공사관을 통해 공식 제출하라고 답했지만 이는 외교적 제스처에 불 과했다. 이승만은 루스벨트의 말을 ‘미국의 선의’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훗날 이승만의 외교는 “부 질없이 타인의 웃음거리를 지었을 뿐”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교활동을 통해 이 승만은 국내외에 명성을 높일 수 있었다. 1919년 1월 18일부터 6월 28일까지 제1차 세 계대전의 전후처리를 논의하는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파리강화회의 개최와 미국 대통령 윌슨 (Woodrow Wilson)이 회의에서 주창한 민족자결주 의에 관한 소식은 식민지 약소민족을 크게 고무시켰 다. 국제여론을 움직여 독립을 쟁취하려는 희망을 품고 국내외에서도 다양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국내 에서는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 즉 3·1운동이 준비 되었다. 상해 신한청년당은 김규식(金奎植)을 파리로 파견했으며 러시아 연해주와 북간도(중국 연변)의 한인 단체들도 윤해(尹海)와 고창일(高昌一)을 파리 로 보냈다. 미국의 대한인국민회에서도 파리강화회의와 뉴욕 에서 열리는 소약소국동맹회에 이승만, 민찬호(閔瓚 鎬), 정한경(鄭翰景)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승 만은 파리강화회의의 성공 가능성을 낮게 판단했다. 대신 그는 윌슨 대통령에게 ‘말이라도 한번 건네볼’ 방법을 모색했다. 이에 따라 이승만과 정한경은 윌 슨 대통령에게 보낼 「청원문」을 작성했다. 이승만은 대통령을 2~3분 만이라도 만나 청원서를 직접 전달 하고자 윌슨의 비서실장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어떠 한 답변도 받지 못했다. 결국 1919년 3월 7일 이승 만은 청원서를 파리의 랜싱 국무장관에게 전해달라 고 요청하며 위임통치 청원 운동을 마무리 지었다. 원래 위임통치제도는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를 둘 러싼 승전국 간의 첨예한 이해 대립을 조정하고, 식 민지의 즉각적인 독립 요구를 완화하기 위해 고안된 완충장치였다. 따라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는 실질 적으로 관리를 위임받은 수탁국(受託國)의 식민통치 와 큰 차이가 없었으며, 그 대상 역시 주로 독일 식민 지를 포함한 패전국의 식민지로 한정되었다. 이승만과 정한경이 위임통치를 청원한 것은 ‘한국 의 즉시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과 한국의 힘만 으로 독립을 이루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들은 위임통치 청원을 통해 일단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후 미국의 도움을 받아 서서히 독립을 모색 한다는 ‘현실적인’ 차선책을 제시하려 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