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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근대 대구의 애국계몽운동과 그 한계 45 한국 최초의 애국계몽운동 단체는  교육 진흥을 내세우고 1904년 6월  서울에서 설립된 국민교육회이다.  국민교육회는 학교의 설립, 문명적  학문에 응용할 서적의 편찬과 번역,  본국 사기(史記)와 지지(地誌) 및 고 금 명인 전적을 수집하여 널리 펴내 는 등 교육과 문화 활동을 전개하였 다. 대한제국기 국권회복운동은 의 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으로 전개되 었다. 대구지역은 일찍부터 일본군 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병전 쟁 당시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형 성되지 않았다. 반면 애국계몽운동 은 개항 이후 성장한 상인자본가와  영남 각지에서 모여든 지주와 유생 이 주도하여 그 단체를 조직하였다.  바로 대구광학회 · 대구광문사 · 대한 협회 대구지회 · 교남교육회 · 달성 친목회 등이다. 달성친목회는 비밀 리에 반일사상을 고취하는 등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적 활동을 전개하 였고, 1910년 나라가 망한 이후에 는 독립운동 단체로 이행되어 갔다.  1910년대 독립운동은 대한제국기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서 축적된 이념과  경험을 내부적 역량으로 승화시킨  결과였다. 1. 대구지역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애국계몽운동 단체가 조직되다 대한제국기 애국계몽운동은 “한편으로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국가 의 독립을 보조 · 유지 · 회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 보수 지배 세력 의 횡포로부터 민중의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기 위해 민중의 의식을 계발한 조직적인 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애국계몽운 동 단체는 교육 진흥을 내세우고 1904년 6월 서울에서 설립된 국민교 육회이다. 국민교육회는 학교의 설립, 문명적 학문에 응용할 서적의 편 찬과 번역, 본국 사기(史記)와 지지(地誌) 및 고금(古今) 명인 전적을 수 집하여 널리 펴내는 등 교육과 문화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제국기 대구지역 애국계몽운동은 1904년 설립된 우현서루(友 弦書樓)와 1905년 2월 설립된 시무학당이 그 시작이었다. 이와 더불어 1906년 1월 설립된 대구광문사와 같은 해 8월 설립된 대구광학회가 교 육진흥과 식산흥업을 목표로 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었다. 대구광문사는 1906년 1월 서상돈 등 대구지역 부호들이 설립하였 다. 1906년 3월 경북관찰사로 부임한 신태휴는 대구광문사와 협의하 여 근대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경북 관찰사 신태휴는 광무황제의 ‘흥학조칙(興學詔勅)’에 따라 3월 20일 ‘흥학훈령(興學訓令)’을 발표하 였다. 김광제와 서상돈 등이 이끌고 있던 대구광문사는 총회를 개최하 여 흥학조칙을 낭독‧선포하였다. 그리고 관찰사 신태휴와 함께 각 군 을 순행하며 학교 설립을 위한 방략을 결의하였다. 대구광학회는 1906년 4월 서울에서 설립된 광학사(廣學社)의 지회 로 1906년 8월 대구 출신 윤필오 · 김선구 등 5 · 6인이 발기하여 결성하 였다. 대한자강회와 밀착되어 대구지방 애국계몽운동에 있어서 주도 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대구광문사와 대구광학회가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나타 난 것이 국채보상운동이었다. 1907년 2월 16일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 제, 부사장 서상돈 등이 발의한 국채보상운동은 대구단연상채소를 필 두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북지방의 경우에는 ‘경북각군 국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