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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920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다 45 1920년 1월 3일 안창호의 신년 연 설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무 회의를 통해 1920년을 ‘독립전쟁 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새로운 대정 방침(大政方針)을 공포하였다. 이는 이동휘와 안창호 사이에 독립전쟁 이라는 공통의 노선이 정립되었기 에 가능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2년’ 의 새로운 방향은 군사적 노력을 통 해 독립을 성공시키는 것이었다. 즉 시 개전은 아니지만 북간도 독립군 과의 연계를 통해 일제와의 전투를 전개하는 방법도 고려되었다. 임시 정부의 군사적 노선은 개전을 하되 철저한 준비가 선행된 뒤에 하자는 국민개병, 즉 칠가살(七可殺) 처단 으로 대표되는 무력투쟁을 전개하 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처럼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 노선은 초기 외교 중심에서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적 독립운동으로, 다시 어떠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 절대독립론으로 점 차 확립되어 갔다. 이러한 과정은 임 시정부가 1940년에 이르러 대한민 국의 국군으로서, 한국광복군을 창 설할 수 있는 군사적 토대가 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을 상대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노선 독립운동을 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도산 안창호가 1921년 5월 17일 한 시국 대연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독립운동은 ‘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동작하는 모든 일’을 뜻한다. 모든 동작이란, 군사운동 · 외교운동 · 재정 운동 · 문화운동 · 식산운동 · 통일운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앞의 여섯 가지 운동을 종합한 명사가 바로 독립운동인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 립 초기의 독립운동은, 모든 동작을 포용하는 개념이 아닌 어느 한 가지 에 집중하는 방식이었다. 외교활동 혹은 독립전쟁만이 옳은 방식이라 며 각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고, 당장 전쟁을 해야 한다는 즉전론(卽 戰論), 준비가 된 후 개전한다는 준비적 독립전쟁론, 전쟁을 기다릴 것 없이 작탄(炸彈)을 이용한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주 장 등 일방적인 면이 강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 수립기의 독립운동 노선은 일반 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외교적인 방략이 우세하였다. 당시는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후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 시기 였다. 파리강화회의 외교활동을 추인하고 지원하는 과정에서 임시정부 가 수립되었기 때문에 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주력할 수 밖에 없 었다. 또한 국무총리 등 임시정부 임원에 임명된 핵심 인물들이 임시정 부에 참여하기 전이었고, 임시정부가 통합을 이루지도 못한 상태였다. 당시의 임시정부는 다양한 독립운동 방략을 구상하고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편 1919년 가을부터 1920년 초 임시정부 내부에서는 파리강화회 의에 대한 실망과 국제연맹 외교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외교활동에 대 해 부정적인 의견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과 맞물려 국제정세 의 판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열강이 쇠퇴하는 대신 미국과 일본이 부상하게 되면서 일본이 중국 산동(山東)반도의 이 권과 태평양 적도(赤道) 이북의 섬들을 획득하게 되었고, 미국은 태평양 으로의 진출을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과 미국 사이에 갈등이 일 어났다. 미국과 일본의 갈등은‘미 · 일 전쟁설’을 촉발시켰다. 이와 동시에 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