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page

Special Theme • 신간회의 ‘민족동권(民族同權)’ 운동 전개와 쇠퇴 45 연회, 주민대회, 각 지회의 대회 등 공론장이 필요했 다. 그런데 일제 경찰은 신간회가 만들고자 한 공론 장을 집회 금지 명령으로 열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신간회의 민족동권 운동은 활성화되기 어려웠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세계대공황을 배경으로 대 중투쟁이 고양되었다. 신간회의 민족동권 운동이 일 제와 싸우려 하지 않는 민중의 무기력한 상태를 배 경으로 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일제에 대한 노동자·농민의 격렬한 시위투쟁은 민족동권 운 동의 적실성을 떨어뜨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민족협동전선 운동의 방식을 재검토했고, 민족유일당이 아닌 노동 자·농민을 선두로 한 협의회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즉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반일적 지식인과 소시민 층을 포괄해 일제에 투쟁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리고 1930년 12월 신간회 부산지회에서 제기된 신간회 해소론에 호응하여 국제 사회주의 운동 기관과 연 계된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 해소운동을 추진했다. 이들은 신간회 전체대회를 통해 해소를 가결함으로 써 신간회에 포진된 대중의 힘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리고 신간회를 새로운 전투적 협동전선의 지식인·소시민 부 대인 반제동맹으로 전환코자 했다. 그러나 신간회 해소운동은 궁극적 으로 결실을 가져오지 못했다. 물론 일제의 탄압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 였다. 일제는 해소 가결을 빌미로 신 간회의 모든 회합을 금지했다. 그러 나 신간회 해소운동은 일제에 대한 투 쟁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즉 싸워보지도 못한 채 소멸로 귀결된 해소운동의 실패 원인을 일제의 탄압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오히려 신간회 해소운동의 실패는 취약한 신간회 의 내적 역량의 반영이었다. 즉 1931년 5월 사실상 유명무실 상태의 신간회에 남아있었던 객관적 힘은 표결을 통한 해소 가결에 한정되었을 뿐, 반일적 투 쟁 역량으로 성장·전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 다. 고려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강사로 재 직 중이다. 주요 연구로는 「신간회 해소론과 전체대회 연구」(『한국민족운동사연 구』 105, 2020), 「신간회의 ‘민족동권(民族同權)’ 운동과 식민지 체제의 균일적  성격」(『한국학연구』 64, 2022), 「신간회 운동의 비타협적 성격 재론」(『역사와  담론』 104, 2022) 등이 있다.  필자 윤효정 신간회의 강연 장면. 전국의 신간회 지방 지회들은 시국 강연회와 계몽 강연회를  자주 개최하였다(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