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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최진동의 독립운동과 군무도독부 45 무의 국민회군, 홍범도와 이청천의 부대, 서일의 군정서 부대 일부가 속 속 자유시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 에게 닥친 현실은 재기의 기회가 아 닌, ‘자유시 참변(일명 자유시사변, 흑하사변)’으로 수많은 독립군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는 한국독립운동 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참혹한 사 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유시 참변 이후 홍범도는 이르 쿠츠크에 머물면서 코민테른 동양비 서부에 의해 개편된 소비에트 적군 제5군 직속 한인여단에서 제1대대 대대장으로 활동했다. 1922년 1월 에는 한인 무장세력 대표에 선출되 었고, 1922년 1월 말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회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최진동 등 과 함께 한인대표로 참여했다. 홍범도는 1937년 스 탈린의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기 전 까지 그를 따르던 부대원들의 생계를 책임지며 한국 독립의 여망을 놓지 않았다. 자유시 참변 이후 최진동은 그해 10월 추풍지역에 서 훈춘한민회 군무부장 최경천의 부대와 함께 군사 교련을 하는 등 무장투쟁의 재기를 엿보기도 했다. 1923년경에는 간도로 귀환하여 옛 군정서군과 협력 하며 재기를 도모하기도 했으나, 이미 간도의 정세가 바뀐 상황에서 새로 병력을 갖추기란 불가능했다. 우리가 최진동과 홍범도를 장군으로 부르는 이유 는 그들이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가족과 전 재산, 그리고 귀중한 목숨을 오로지 독립을 위해 헌 신했을 뿐만 아니라, 부대원들의 생계와 그들 의 안 위까지 돌보는 지휘관로서의 사명을 다했기 때문이 다.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이 땅, 이곳의 평화는 이 들의 고귀한 목숨이 담보되었음을 다시 한 번 상기 해본다. 필자 이숙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공저)로 『배달의 역사, 새 길을 열다: 역주 대한독립선언서 · 신단실기 · 신단민사 · 배달족역사』(화성시청, 2020), 『(여성사로 읽는)항일독립운동』(항일여성, 2020), 『봉오동·청산리 독립전쟁 자료집: 봉오동 청산리전투 100주년』(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 2020), 『3 · 1운동 100년』(휴머 니스트 출판그룹, 2019) 등이 있다. 봉오동전투의 승전 소식을 보도한 ‘독립군 승첩’ 독립신문 보도 기사(192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