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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일제의 중국 침략과 관내 한인의 동향 45 국민정부의 전시수도인 충칭(重慶)에 정착한 직후인 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 을 거행하고, 임시정부의 국군이자 장차 연합군과 함 께 대일항전을 전개할 무장세력으로서 한국광복군 을 창설했다. 1941년 11월에는 삼균주의(三均主義) 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발표하 며,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회복 후 새롭게 수 립할 민족국가 건설계획도 함께 마련해나갔다. 태평양전쟁 발발과 독립운동 세력 통합 시도 중일전쟁과 동시에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동남 아시아 지역으로 침략을 확대해 나가던 일제는 1941 년 12월 7일 미국의 해군기지인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일전쟁(일명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일으 켰다. 중일전쟁에 이어 미일전쟁까지 발발하면서 일 제의 패망이 예견되고 조국독립의 희망이 더욱 커지 자 중국 관내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 세력 은 일제와의 항전을 위해 독립운동 역량을 한 곳에 집 중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에 크게 공감하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좌우익 독립운동 세력 결집을 모색했다. 이는 중국 관내지역 한인 무장세력의 군사역량 통 합부터 추진되었다. 1939년 11월 아나키스트 계열 의 독립운동 세력을 주축으로 결성된 한국청년전지 공작대가 1941년 1월 한국광복군에 편입된 데 이어, 1942년 7월에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 제되면서 광복군을 중심으로 군사통합이 완료되었 다. 이와 함께 정치통합의 일환으로 좌익진영 인사들 이 임시의정원 의원에 새롭게 선출되고, 1942년 10 월 열린 제34차 의정원 회의부터 참석하면서 좌우익 세력이 모두 참여하는 통일의회로 운영되었다. 1944 년에는 헌법 개정을 통해 부주석 신설을 비롯한 정 부 조직을 확대하고 좌우익 세력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좌우연합정부 구성을 완료했다. 한편, 당시 중국 관내지역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와 한국광복군 외에 중국공산당 지역인 옌안(延安)을 중심으로 한 화북지역에서 독자적으로 활동 중인 또 다른 독립운동 세력도 있었다. 이는 화북에서 활동하 던 한인들이 1941년 봄 북상한 조선의용대 대원들 과 결합해 1942년 7월 조직한 조선독립동맹과 그 무 장조직인 조선의용군이었다. 서로 실체를 인정하며 존중하던 임시정부와 독립동맹은 1944년 경부터 일 제의 패망과 독립에 대비해 양측이 통일전선을 이루 자는데 합의를 도출하고 상호 연계를 모색했다. 비록 실행 직전 일제의 항복으로 실질적인 성과로는 이어 지지 못했지만, 독립운동 세력이 통일전선을 모색하 고 공동으로 독립에 대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 를 찾을 수 있다. 연합군과 함께 공동 대일항전 전개 미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 일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한데 이어 일본과 싸우고 있 던 연합군과 대일항전을 전개했다. 먼저 인도 · 미얀마 전선에서 일본군과 전쟁 중이던 영국군이 합작을 요 청하자 1943년 8월 한국광복군 대원 9명으로 구성 된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를 파견했다. 교 육을 마친 후 영국군에 분산 배속된 대원들은 임팔전 선 등에 투입되어 일본군에 대한 정보분석과 대적선 전공작 등을 맡았고, 일본군에 포위된 영국군 1개 사 단을 구출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 공작대는 1945 년 7월 인도 · 미얀마 전선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격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