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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샌프란시스코 45 호)를 창설했다. 리 버 사 이 드 에 서   창설한 공립협회는  1905년 1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총회관 개 소식을 거행하여 샌 프란시스코를 중심 으로 한 활동을 펼쳤 다. 공립협회는 1905 년 11월 20일 샌프란시스코의 938 퍼시픽 스트리트 (Pacific Street)에서 기관지 『공립신보』를 창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운동을 선도하였다. 공립협회는 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 대 지진이 발생하여 공립협회총회관이 소실되어 인근 의 오클랜드로 옮겨야 했다. 그러다 1907년 5월 다 시 샌프란시코로 돌아와 부케넌, 오스틴, 새크라멘토 의 스트리트에서 임시 회관을 열었다가 1908년 8월  938 페리 스트리트에 집을 얻어 정착했다.  1906년 1월 샌프란시스코에는 파사데나에서 설 립한 대동교육회가 대동보국회로 개명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동보국회는 1907년 10월 3일 기관지  『대동공보』를 창간하고 『공립신보』와 함께 샌프란시 스코에서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09년 2월 1일 공립협회는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통합운동을 성사시켜 미주 한인 최초로 통합단체인  국민회를 탄생시키고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 바꾼  뒤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재미 한인의 민족독 립운동을 선도했다. 국민회 설립을 방관하던 대동보 국회는 1909년 8월 시애틀에 있는 동맹신흥회와 병 합한 뒤 국민회와 통합운동을 추진해 1910년  2월  10일 대한인국민회를 탄생시켰다. 이로써 미주 지역 의 민족운동은 미국 본토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하 와이에는 호놀룰루를 중심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 했다. 대한인국민회는 민족주의의 이념을 가지고 미주  한인사회의 안녕과 자치 그리고 조국 독립을 최고 의 목표로 삼았다. 그 조직은 샌프란시스코에 본부 를 둔 중앙총회 산하에 북미 · 하와이 · 멕시코 · 시베리 아 · 만주 등 5개 지역에 지방총회를 두었으며, 그 밑 에 116개소의 지방회를 두어 제1차 세계대전이 진 행 중인 1915년경까지 해외 한인 독립운동의 중추 적인 기관으로 활동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 방총회는 1914년 캘리포니아주 당국으로부터 법인  관허를 얻어 정부적 기능도 갖추어 한인들의 생명과  재산 및 권익을 보호하고 증진하는데 앞장섰다. 이 에 따라 재미 한인들은 자신의 안전과 권익을 위해  스스로 대한인국민회 회원이 되었고 국민의무금이 란 이름으로 회비를 납부하였다. 그러나 대한인국민 ➊ 1912년 LA부근 오렌지농장에서 일하는 안창호 ➋ 안창호와 공립협회 동지들(1906년. 앞줄 왼쪽부터 송석준, 이강, 안창호, 뒷줄 임준기, 정재관, 안창 호선생기념사업회 제공). ➊ 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