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page


44page

형제 의병장 김태원 金泰元(1870.9.16.~1908.4.25.) 건국훈장 독립장(1962년) 김태원·김을 형세 의병장은 이곳 나주시 문평면 북동리 갈마지(현 상하마을)에서 태어났다. 김태원의 이름은 준(準), 자는 태원 태중(太仲), 호는 죽봉(竹峰)이며, 김율의 호는 청봉(青峰)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형제 의병장은 용모가 준수하고 학문이 출중했으며, 호방 담대한 성품의 정의로운 청년이었다. 특히, 김대원은 향리의 사회적 부조리와 폐단을 바로잡는 데 앞장섰다.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김돈(金燉) 등 동지들과 상의한 후, 1907년 10월 기삼연(奇參衍) 의병장이 이끄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합류 하였다.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일제 군경의 기습을 받았으나 감태원의 짐작한 지휘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호남장의회맹소의 선봉장을 맡아 고창 광주 나주 담양 영광·장성·함평 등 전라도 서부지역을 무대로 항일투쟁을 주도 하였다. 형제 의병장은 일제 군정 및 일본 이주민을 구축하고, 친열 관리와 밀정 등의 처단에 정의의 총칼을 드날렸다. 주재소와 우편취급소 등 일본 김략기구 공격에도 앞장섰음은 물론이다. 1908년 선달 담양 부동은 전투의 장성 도전 전투에서 크게 이거 호남의병의 이름을 전국에 밀쳤다. 의병장 기산면이 순국하자 형제 의병장은 호남 의소(湖南所)의 이름으로 각각 수백 명의 군사를 아끌고 의병항쟁을 계속했다. 사람들은 죽봉의진을 참봉산(參陣), 정봉 의진을 박사진(陳)이라 불렸다. 이들이 사생쥐의(捨生取義)의 의병정신과 백절불의 용기로 결사항전하자 인제 군경조차 크게 두려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