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page

44 2025년 5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귀환과 해방 정국’ 군을 소부대 활동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였다. 1940년 초 주보중, 풍중운 등 제2·3로군 지도자들 과 소련대표가 하바롭스크에서 회의를 가지고(1차 하바롭스크 회의)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소련측의 임 시적 지도와 원조, 편의 제공에 합의하였다. 이에 따 라 동북항일연군은 각 소부대별로 국경을 넘어 소 련 영내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의 소련 월경은 1939~1942년 장기에 걸쳐 진행되었다. 1로 군 제2방면군을 지휘하던 김일성 역시 1940년 10월 23일 12명의 조·중 대원을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 연이은 동북항일연군의 소련 입국에 따라 극동 지 역에는 이들의 집단 주둔지가 조성되었다. 1940년 겨울부터 현재의 하바롭스크 근방 아무르 강변의 비 야츠코예 마을에 A야영(일명 北野營)이, 현 우수리스 크 지역인 보로쉴로프 근처에 B야영(일명 南野營)이 설치되었다. 김일성 등의 제1로군 부대는 제2로군의 일부와 함께 B야영에, 제3로군과 제2로군의 다수는 A야영에 주둔하였다. 1940년 말 현재 B야영과 A야 영에는 각각 114명과 158명의 인원이 주둔하였다. 소련측은 1940년 12월 중순 ~ 1941년 3월 중국 측과 하바롭스크 제2차회의를 열고 항일연군 세력 을 소련군의 단일한 지휘 체계 아래 두고자 했으나, 항일연군 지도부 내의 반발에 따라 동북항일연군과 중공 당조직은 독자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동북항일 연군 지도부의 입장은 소련 영내의 야영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여건이 되면 다시 만주로 돌아간다는 것이 었다. 그런데 1941년 4월 소련과 일본 사이의 중립조약 이 체결되면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의식한 소련측 은 동북항일연군이 중국 동북으로 돌아가 활동하는 것을 중지시켰다, 항일연군은 현실적으로 야영 내 부대 정돈과 군사훈련 및 교육에 집중할 수밖에 없 었다. 소련정부는 향후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한 항 일연군 활용 가능성을 내다보며 1942년 7월 16일 동북항일연군의 A야영(북야영)에 ‘88중·조여단’ 조 직을 명령하였다. 후에 ‘88독립보병여단’(이하 88여단)으로 개칭되 는 ‘88중·조여단’은 편제상 소련극동전선군 사령부 산하 정찰부 관할 아래 있었다. 여장(旅長)은 주보중 이, 정치담당 부여장은 중국인 이조린이, 참모장은 1930년대 남만주 지방에서 활약한 동북항일연군 경위려(警衛旅)  대원들 1943년 10월 북야영(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 근처)에서 기념 촬 영한 동북항일연군 교도려(敎導旅) 주요 간부진(한겨레신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