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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025년 1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독립운동의 목표와 방법론 재조명’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하던 시기 에 ‘105인 사건’을 다룬 『한국교회핍박』(1913)을 발 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미국의 대일정책과 결을 달 리하는 한국인의 대일투쟁을 소모적이라고 보았 다. 의병투쟁에 대해 일본 군대에 의해 쉽게 진압될 수 있으며,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해도 외부에 제대 로 알려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토 히로부 미[伊藤博文]와 친일미국인 스티븐스 ‘암살’같은 행 위가 오히려 서양 기독교인의 동정을 잃게 만들며, ‘105인 사건’과 같은 날조 사건이 일어나 국내 기독 교인을 탄압하는 데 이용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시 각은 결국 한국의 독립문제를 미국의 입장에서 바라 보고 판단하게 만들었다. 이승만의 대미의존적 태도는 일본에 대해 유화적 인 자세를 취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당 시의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한 나름의 ‘신중한’ 태도 였을지 모르나, 대외적으로는 그가 일본과 타협하려 는 듯한 인상을 줄 우려가 있었다. 이승만의 첫 외교활동, 그리고 위임통치 청원 1904년 11월 4일, 석방된 뒤 미국으로 떠났다. 유 학을 위한 길이었지만 한가지 목적이 더 있었다. 민 영환과 한규설의 개인 밀사 자격으로 미국에서의 외교 임무를 맡은 것이다. 이승만은 주한미국공사 를 역임한 딘스모어(Hugh Dinsmore) 상원의원을 만나 민영환·한규설의 편지를 전했다. 그리고 딘스 모어의 주선으로 1905년 2월 20일 국무장관 헤이 (John Hay)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헤이는 주로 한 국의 선교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승만은 면 담이 끝날 무렵 중국에서처럼 한국에도 ‘문호개방정 책(Open Door Policy)’을 발표하여 한국의 영토와 주권을 보장해달라고 부탁했다. 헤이와의 만남으로 이승만의 ‘밀사업무’는 일단 마무리되었다. 이후 학업에 열중하던 이승만은 1905년 8월 4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와 만 나게 되었다. 하와이에서 활동하던 윤병구(尹炳求) 목사가 러일전쟁 강화회의를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 다 돌아오던 국무장관 태프트(William H. Taft)를 만 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얻은 것이 한성감옥 시절의 이승만(왼쪽 끝). 앞줄 오른쪽 두번 째는 이상재(이승만기념사업회 제공) 상해교민단 주최 이승만의 상하이 도착 환영회 장 면 (독립기념관 제공) 이승만이 옥중에서 간행한 저서 『독립정신』 표지(태평 출판사, 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