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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024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기획특집 ‘한국독립운동과 백두산’ 우마차를 공격하여 파괴시켜 적군을 완전히 고립시 켰다. 이에 일본군은 총기와 군량 및 많은 군수물자 를 버리고 도주하는 등 궤멸되었다. ④ ‘경신대참변’과 그 현장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대패하자 일본군은 한인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박멸할 목적으로 서·북간 도의 한인마을을 습격하여 독립군은 물론 민간인까 지 무차별 학살을 단행하였다. 1920년 10월 5일부 터 11월 23일까지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한인은 훈 춘현에서 242명, 연길현에서 1,124명, 화룡현에서 572명, 왕청현에서 347명, 영안현에서 17명, 서간도 지방에서 804명에 달하였다. 이를 소위 ‘간도참변’ 혹은 ‘경신대참변’이라 부른다. 일본군의 이 같은 만 행은 이듬해인 1921년 4월 초까지 이어져 4천 명에 가까운 한인들이 살해되었고 3천 채 이상의 가옥이 소실되어 재만한인사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일제 만행의 대표적 사례인 장암동 참변의 사례를 살펴보자. 장암동은 용정시 동성용향(東盛勇鄕)에 속 해 있다. 이곳은 1909년 조선인들에 의해 개척되 었 는데, 당시 마을 주민 대다수가 기독교도였고 간도 국민회와 의군단과 같은 독립운동 조직의 관련자들 이거나 후원자들이었다. 특히 이곳의 영신학교는 민 족교육과 독립운동의 온상이었다. 일제는 장암동을 이른 바 ‘불령선인(不逞鮮人)’ 책 원지의 하나로 간주하였다. 이후 1920년 10월 30일 용정에서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14사단의 스즈키 다 케오미(鈴木武臣) 대위가 거느리는 보병 72명과 헌 병 3명, 경찰 2명 등은 새벽 4시경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 6시 30분경 장암동을 포위하였다. 이 들은 마을 주민을 협박하여 교회 마당에 집결시킨 후 청장년 33명을 독립군 부대와 내통하였다는 이유 로 교회당 안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며칠 뒤 다시 찾 아와 무덤을 파헤쳐 시체들을 한데 모은 다음 석유 를 붓고 시체가 재가 되도록 소각해 버렸다. 1999년 6월 30일 용정 3·13기념 사업회는 지금은 없어진 마 을 입구에 ‘장암동참안유지(獐巖洞慘案遺址)’라는 기 념비를 세웠다. 나자구진에서 왕청현 방향으로 본 대전자령 일대(2019년, 독립기 념관 제공) 서산포대에서 바라본 나자구 전경. 멀리 수분하와 이동휘 선생 이 설립한 대전학교가 있던 태평구가 보인다(2007.5, 나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