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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023년 4월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에 입국한 것으로 나온다. 이들 초기 입국자들 대부 분은 중국(홍콩, 상하이)이나 일본(고베, 나고야, 요 코하마)을 경유해 들어온 인삼장사들이었고 일부는 유학생들이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6년 부터는 이같은 미국 입국자들은 급격히 줄어드는데, 그것은 일본이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한 후 한국인들 의 도미를 엄격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미국측 입국 통계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1885 년 6월 12일 갑신정변에 실패한 서재필, 서광범, 박 영효, 변수, 이규완, 정난교, 임은명의 7명이 망명자 신분으로 샌프란시스코 도착했다. 이들 가운데 서재 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1년 정도 생활하다 홀렌백 의 도움으로 미국 동부의 윌크스베리로 떠났다. 1903년 1월 하와이로 이민 간 한국인들은 1905년 부터 미국 본토로 입국하기 시작했다. 1905년 2월부 터 미국의 대북부철도회사와 북태평양철도회사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면서부터 하와이 한국 인들은 하와이보다 더 나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조건을 듣고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의 샌프란시스 코로 입국했다. 그리하여 1905년 400여 명, 1906년 450여 명, 1907년 150명이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입 국했다. 하지만 1907년부터 미국 입국자의 수는 급 격히 줄었고 이후 극히 적은 수만이 미국 본토로 이 동하였다. 이것은 미국 정부가 행정명령 제589호를 발동하여 한국인과 일본인의 본토 이주를 금지한 때 문이고, 1907년 미 · 일 간에 소위 신사협정을 맺어 한 국과 일본에서 이민 오는 것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한국인 이민자들은 미국 본토의 첫 관문인 샌프란 시스코에 무사히 도착했더라도 샌프란시스코란 도 시에서 안정적으로 거주하기란 쉽지 않았다. 샌프 란시스코는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아주 심했다. 미 국 본토에 동양인들, 특히 중국인 노동자들이 증가 하자 미국 백인들은 중국인들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 중엽부터 미국 이민을 시작한 중국인들은 1870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총인구의 십분의 일을 구성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주는 1882년 중국인배 척법을 제정하고 매 10년마다 재개정하여 중국인들 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수많은 차별 조 항으로 중국인들을 배척했다. 1905년에는 샌프란 시스코와 오클랜드에서 ‘일본인과 한국인 반대동맹’ 을 조직해 한국인들을 노골적으로 차별 대우했다. 1913년에는 캘리포니아 외국인토지법을 만들어 동 양인들은 땅과 집을 소유할 수 없고 땅 임대도 3년을 넘지 못하게 했다. 1924년에는 동양인배척법을 제 정해 동양인의 시민권과 소유권의 금지를 강제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단체 공개적으로 자행된 동양인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차별 대우 속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살아가던 한국인 들의 생활은 비참하고 무질서했다. 이를 보다 못한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1903년 9월 23일 동 지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초로 상항(桑港)한 인친목회란 단체를 결성했다. 1902년 10월 14일 유 학을 목적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신혼의 안창 호가 자신을 위한 학업보다 한인들의 생활과 정신을 개선하여 단합을 모색하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하고 단체를 결성한 것이다. 그런 후 안창호는 한인들에 게 질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리 버사이드로 옮겨 그 곳 오렌지농장에서 한인들과 함 께 노동하며 1905년 4월 5일 공립협회(총회장 안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