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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43 ■ 3.1 운동의 발발과 전개 1919년 3월 1일. 탑골 공원에는 학생들을 비롯한 수많은 군중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이들의 손에는 저마다 태극기가 쥐어져 있었다. 그 시각 근처 요리점 태화관에는 손병희, 이승훈 등 종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민족대표 29인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원래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하였으나 사고가 날 것을 염려하여 음식점 에서 조용히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뒤 일본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수한 뒤 모두 연행되었다. 한편, 탑골 공원에서는 오기로 한 29인의 민족 대표가 2시가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자 우왕좌왕하였다. 그 때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 위 로 뛰어 올라가 힘찬 목소리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이하 생략) 독립 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대한 독립 만세!” 함성이 밀물처럼 터 져 나왔고 모든 거리는 순식간에 태극기 물결로 넘실거렸다. 갑작스러운 시위에 놀란 일제는 시위 중단을 요구하였으나 군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제는 군 인과 경찰을 동원하여 평화로운 시위에 총과 칼로 대응하였다. 그럴수록 독립을 요구하는 만세 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 커졌고, 태극기를 쥔 손은 더욱 힘차게 움 직였다. 시위 행렬은 날이 저물도록 끊이질 않았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조선 독립성 / 십 년을 참고 참아 인제 터졌네 / 뼈도 조선 피도 조선 이 피 이 뼈는 / 살아 조선 죽어 조선 조선 것일세 / - 3.1 운동 때 불렀던 투쟁가 종교인과 학생의 주도로 시작된 만세 운동은 차츰 농민, 노동자, 상인 등 일반 민중들의 참여가 더 해지면서 거국적인 형태를 띠었다. 학생들은 고향으로 내려가 시위운동을 이끌었고, 노동자들은 파 업 투쟁을 벌이며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만세 시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정재용 선생 광화문 네거리 기념비전 앞에서 군중들이 만세를 외치고 있다. 3.1 운동은 전국에 걸쳐 2달여 동안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