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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엄씨대종회보 43호 21 경술보(庚戌譜 1850. 慶北 玄風. 摠制公 派譜)에도 무진보(戊辰譜) 중간본 등재부분까지 만 실 렸고, 을해보(乙亥譜 1875 경성 원남동) 발간 정보 역시 삼성당공계에는 연결이 되지 않 아 누 보(漏譜) 됐는데, 그 틈사이에서 을해보(乙亥譜 1875)에 삼성당공계의 종지(宗支) 훼손 사태 가 발생했다. 壬寅譜(1962 서울 신당동) 발간준비 당시 선친 찬영(贊永 26세)은 삼성당 공계 를 대표하여 찬무(贊務) 역할을 수행중이어서 나는 대학 신입생 시절에 선친을 수행하여 신당 동 보소를 방문했었다.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이 보소에서 각자 맡은 일에 열중하는 모습 이 참 으로 감사하고 존경스러웠다. 젊은 대학생이 찾아와 주니 힘이 나고 고맙다는 말씀에 내 가 오 히려 면구스러웠다. 그때, 나는 어쩌면 소풍 가는 기분으로 선친을 따라 갔던지도 모르 겠다. 그러나 선친은 중대한 사명을 온몸에 짊어지고 임전무퇴의 자세로 임인보(壬寅譜) 발간 에 임 한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선친이 보통학교 5학년때, ‘’國家에 歷史가 없으면 백성은 살아 있어도 나라는 亡한 것 과 같 듯이 姓氏는 있어도 族譜가 없으면 ‘상것’ 이는 말을 들은 뒤부터 族譜를 연구하여 嚴門 의 뿌 리를 캐보아야 되겠다.”고 생각 했단다. 왜 우리 집에는 族譜가 없는가를 부친(錫性. 25 세. 祖 父는 갓을 쓰고 찍은 사진으로만 뵈었다. 祖母도 마찬가지다.)께 여쭈었다고 했다. 조부 석성(錫性)의 대답은, 정사보(丁巳譜 1917 주덕柱悳. 전북 부안. 摠制公 후손 派 譜)를 집에 모시고 있었는데 갑오군란 중에 소실되었다면서, 종친 가운데 下古里 주원(柱源 ) 댁에 보존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주원 족질과 자주 만나 소통하며 강진군내 종친들 과 가 승보(家乘譜)라도 만들자고 합의가 되어 초안이 거의 완성되던 차에 1945년 乙酉解放을 맞아 중단되었다 했다.(아쉽게도 그 초안이 전해오지 않는다.) 선친 찬영(贊永)이 본격적으로 보첩관계 업무에 직접 관여한 것은 무자보(戊子譜. 1948 . 전남 화순. 摠制公 후손 派譜)부터다. 무자보 발간 소식을 접한 문중에서는 선친 주관하에 계 보(系 譜) 등재를 위해 주원(柱源), 주복(柱福), 주흔(柱欣), 주철(柱喆), 주남(柱南), 주채(柱彩), 주 석(柱 石), 옥섭(玉燮)등 종친들과 힘을 합쳐 각종 자료를 수집하던 중 을해보(乙亥譜.1875)를 접하 게 되었는데, 삼성당공계(三省堂公系) 종지(宗支)가 훼손된 중대 사실을 정사보(丁巳譜)를 주관 했던 주덕(柱悳)공으로부터 듣고 확인하게 되었다. 다음 대동보(大同譜) 발간시에 종지(宗 支)를 영월엄씨 복야공파 삼성당공계, 끊기지 않는 여정(꿈을 실현해 가는 발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