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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동북항일연군과 북한정권의 수립 43 1936년 중국공산당 만주조직의 결 정에 따라 여러 항일부대들을 통 합하여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 軍)’을 조직했을 때 한인들의 역할 은 상당하였다. 후에 ‘88독립보병 여단’(이하 88여단)으로 개칭되는 ‘88중(中)·조(朝)여단’은 편제상 소 련극동전선군 사령부 산하 정찰부 관할 아래 있었다. 여장은 중국인 주보중이, 참모장은 사마르첸코 소 좌, 부참모장은 조선인 최용건이 임 명되었다. 제1영 영장은 김일성(대 위)이, 정치위원은 안길(安吉, 대위) 이 맡았다. 이후 북한으로 귀환한 88여단 출신 인사들은 응집력 측면 에서 다른 정치집단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장기간의 생사를 건 무장투쟁을 함께 다진 강한 결속력 이 있었고, 소련 야영에서 2~3년의 교육 훈련을 함께하며 정치이론과 세계관의 동질성을 확보한 집단이 었다. 이러한 남다른 응집력과 결속 력을 토대로 그들은 1945년 말에 서 1946년 초반 중앙정계의 핵심 으로 부상한 김일성을 중심으로 강 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동북항일연군의 성립과 조선인 우리 민족의 식민지 시기 중국 동북 지역의 한인들은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중국혁명에 참여했는데, 특히 1931년 ‘만주사변(일명 9·18사 변)’ 이후 각지에 조직된 항일유격대와 유격근거지 건립에 적극 참가하 였다. 1933~34년 동북인민혁명군 1군 독립사와 2군 독립사가 중국공 산당 계통의 정규군으로 조직되고, 1936년 중국공산당 만주조직의 결 정에 따라 기타 여러 항일부대들을 통합하여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 聯軍)’이 조직되었을 때에도 한인들의 역할은 상당하였다. 동북항일연 군은 1군에서 11군까지 결성되어 중국 동북의 동·남·북만(北滿) 등지에 서 치열한 항일전쟁을 수행했는데, 1938년경 동북항일연군의 병력은 약 1,850명이었다. 1군과 2군, 특히 2군은 한인들이 절반 가량을 차지 하였고 김일성이 이끄는 제3사 병력의 대부분은 한인이었다. 1936~37 년 동북항일연군은 1~3로군으로 재편되었는데 1군과 2군이 통합되어 제1로군(총사령 : 양정우[楊靖宇, 본명 馬尙德])이 성립하여 남만·동만을 무대로 활동하였고, 동북항일연군 제4, 5, 7, 8, 10군을 통합하여 제2로 군이 길동(吉東)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2로군의 총지휘는 중국인 주보중(周保中), 참모장은 조선인 최석천(崔石泉), 즉 최용건이었다. 북 만지역에는 3로군이 활동하였고 총지휘는 중국인 이조린(李兆麟, 張壽 籛 ), 참모장은 조선인 허형식(許亨植)이 맡았다. 3로군과 함께 있던 중 공당 북만성위원회의 서기는 조선인 김책(金策)이었다. 동북항일연군의 소련 입국과 88독립보병여단 1940년부터 일본의 관동군이 대대적인 병력 증강을 통해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하는 한편, 항일연군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면서 만주 지역, 특히 남만과 동만의 항일연군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거듭되는 전투 에 따른 대원들의 희생과 일제의 탄압, 회유공작에 따라 변절·도주· 투 항의 사례도 빈발했다. 이에 1938년경 최대 3만 명에 달했다고 평가되 던 동북항일연군 세력은 1940년 말경 1,400명으로 감소하였다. 이러 한 상황에서 1939년 10월 중공당 만주성위원회와 제1로군 주요 간부 들은 항일연군의 남은 역량을 보존하고 더 큰 손실을 피하기 위해 1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