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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의 분기점, 2 · 8독립선언 43 통치정책의 모순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도쿄와 오사 카 등 주요 도시에서 열린 대중집회는 수천 명의 조 선인이 참가할 정도였다. 1927년 9월에는 투쟁의 효 과를 높이기 위해 ‘조선총독정치 탄핵동맹’을 결성 하고, 상시 민족운동으로 정착시켰다. 2·8독립운동을 주도한 단체의 1920년대 합법투쟁 은 1930년대 비합법투쟁기에는 조선어 투쟁, 조선 어 연극 운동, 비밀결사의 방법으로 이어져갔다. 학 우회도 교토나 나고야 등 지역의 대학별 학우회 조 직을 통해 운동을 이어갔다. 조선어 투쟁은 민족의 식의 각성 투쟁이다. 당국이 재일조선인 사회에 조 선어 사용을 금지하자 1938년부터 교토에 있는 도 시샤[同志社]대학 유학생학우회는 조선어사용금지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조선어 연극 운동은 당시 당국이 금지하던 조선어 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일 본 당 국의 탄압이 적지 않았는데, 검거 과정에서 일본 당 국이 조선어 연극 운동을 대하는 인식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당국은 1936년에 조선예술좌 임원 총 12 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했는데, ‘예술운동을 빙자한 사상운동 혐의’였다. 1939년의 학생예술좌 사건에서 당국은 ‘일본에서 가능한 합법 부문이고, 조선으로 돌아가서도 계속할 수 있는 용이함’에 주 목했다. 조선어 연극 운동이 합법을 가장한 비합법 운동이었음을 간파한 것이다. 이같이 2·8독립운동을 주도한 재일조선인운동단 체는 1919년 2월 8일에 멈추지 않고 당국의 집요한 탄압 속에서도 합법과 비합법운동을 가리지 않고 재 일조선인운동의 역사를 이어나갔다. 필자 정혜경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특별연구원,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조사과장, 서울대 강사, 한일민족문제힉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 다.  『일제시기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연구』(2001), 『일본제국과 조선인 노무자 공출』(2011), 『항일과 친일의 재일코리안운동』(2021), 『조선 민중이 체험한 ‘징용’』(202 1)  등 다수 논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