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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정의부의 국내진공작전 43 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에는 많은 청년들이 말을 듣고 쉽게 독립군이 되었고, 목숨을 내놓고 일제를 상대로 무 장투쟁을 벌였다. 이처럼 오동진은 정의롭고 온화한 성품의 지도자 였다.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그를 따랐다. 그러나 이 에 더해 오동진에게는 청년들이 보다 쉽게 공감할 있는 보다 미래지향적인 국가건설론의 제시가 있었 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한 실마리는 『조선일 보』 1929년 12월 11일자에 실린 「오동진 예심결정 서」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오동진 은 세계인류의 진실한 평화를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 다. 오동진의 이러한 주장은 1924년 정의부헌장에 나타나 있는 정의부 설립 목적보다 일보 진전된 모 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1924년 설립 당시 정의부 헌 장에서는 인류 평등, 민족 생영의 정신만을 강조하 고 있지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927년 경에는 보다 사회주의적이며 국제 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오동진계열의 정의부 의 용군들은 오동진의 이러한 사상적 경향과 맥락을 같 이 한 것 같다. 이들은 모두 오동진의 심복으로 알려 진 인물들이다. 그중 특히 정이형(鄭伊衡)은 오동진 계열로 고려혁명당을 추진한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 져 있다. 국내진공작전: 주재소 습격 의거 정의부 국내 활동은 무장투쟁과 군자금 모금 활동 으로 대변될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두 활동이 함께 이루어진 경우들도 있다. 「오동진 예심결정서」에 기 록된 바와 같이, 오동진은 평북 초산군, 벽동군, 철산 군의 주재소 습격 의거를 주도하였다, 이는 정의부 에서 행한 국내진공작전 중 대표적인 그리고 격렬한 투쟁이 아니었나 판단된다. 정의부의 군사활동 중 대표적인 국내 주재소 습격 의거는 평안북도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압록강을 경 계로 만주와 인접한 지역이고, 정의부의 본부가 있 던 유하현(柳河縣) 삼원포지역과도 멀지 않은 곳이므 로 일단 지형적으로 공격하기도 퇴각하기도 유리한 지점들이 아니었나 판단된다. 이들 독립군들은 오동 진과 같이, 대부분 대한통의부, 정의부 등에서 함께 정의부 기관지 『젼우』제3호(1927.7.1,  필자 제공) 정의부 선언서(1928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