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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구국계몽운동과 신민회 43 “사천 년 구(舊)한국 말년에 나라를 잃은 귀신이 되려 는가, 미래 억 만년 새 한국 초년에 중흥공신이 되려 는가”라며 한국인이 역사적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고 호소했다. 이렇게 신민회가 개혁운동 단체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국권을 회복하면 군주제를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공화제 국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신민회 회원을 중심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19년 3 · 1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신민회 회원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따라서 신민회는 대한제국에 서 대한민국으로 넘어가는 사상적·조직적 연결 고리 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구국계몽운동과 관련하여 신민회가 지니는 또 하 나의 의의는 대한제국의 멸망이 가시화된 1910년 3 월 국권 회복을 위해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국 외에 독립군기지와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그때까지 실력양성 운동에 치중해 오 던 데서 벗어나 무장투쟁도 병행하기로 노선을 수정 한 것으로 구국계몽운동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역 사적 의의를 지닌다. 신민회의 새로운 구상은 1910 년대 초 만주의 신한민촌과 신흥무관학교(신흥강습 소), 동림무관학교 등의 건설로 실현됐다. 이를 통해 근대식 군사교육을 받은 청년 장교 들이 양성됐고, 1919년 3 · 1운동 이후 많은 청소년이 만주 (중국 동북지방)로 넘어오자 이들을 받아들여 독립 군 부대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는 대한제국 후 기에 따로 진행됐던 실력양성운동(구국계몽운동)과 무장투쟁(의병전쟁)이 신민회에 의해 하나로 통합됐 음을 의미한다. 대한제국 후기는 을사조약, 고종의 강제양위와 정 미7조약, 군대해산 등 일본의 국권 침탈이 이어지고 마침내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병합으로 국권을 상실 한 암울한 시기였다. 하지만 한민족은 구국계몽운동 과 의병전쟁의 양면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절망의 시기’를 ‘대분발의 시기’ ‘민족역량 증강의 시기’로 역전시켜 훗날 나라를 되찾아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기초를 만들었다(신용하). 신민회는 구국계몽운동 에서 핵심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근대국가 의 이념적 토대를 제시했다. 또 국망이 가시화되자 의병전쟁의 무장투쟁 전략을 받아들여서 국권 회복 의 방략을 제시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신민회는 구 국계몽운동을 국권 회복 운동으로 연결하고, 나아가 근대국가 수립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학사·석사학위를 받고 조선일보에 입사해 논설위원·문화부장·선임기자 등을 역임했다. 정년퇴임 후 서울대에서 「대한제국 후기 신흥 정치 세력과 민족운동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으로 있다. 『‘대한민국’ 국호의 탄생』,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 『한국의 자주적 근 대화에 관한 성찰』 등의 저서와 「신민회의 결성 시점에 대한 재고찰」(『대동문화연구』 121, 2023) 등의 논문을 발간하였다. 필자 이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