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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백두산 주변의 주요 독립운동과 유적지 43 유인하여 섬멸함으로써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2 도구, 완루구에서도 홍범도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 본군들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독립군과 일본군과의 전투는 10월 26일까지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곡 등에서 10여 회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이들 전투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의 전과 및 피해는 자료마다 서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대한민 국임시정부가 조사하여 발표한 기록에 따르면 일본 군 전사자는 1,200여 명에 부상자는 2,100여 명이었 고, 독립군 측은 전사자 130여 명, 부상자 220여 명 이었다(다만 임시정부 측의 통계가 다소 과장되었다 는 견해도 있다). ③ 대전자령전투와 그 현장 대전자령전투는 1920년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과 더불어 한국 독립전쟁의 3대 대첩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1930년대 무장 독립운동 최대의 성과로 손 꼽힌다. 동만주의 동경성(東京城)전투 이후 왕청현 산악 지 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지청천과 한국 독립군은 중국 의용군 지도자 시세영(柴世榮)의 길림구국군과 함께 한 · 중 연합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자구(羅 子溝)에 주둔하고 있던 이케다 노부요시(池田信吉) 대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19사단 소속 간도파견대 가 연길현으로 철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적군을 기습할 수 있는 예상지점인 대전자령(大甸子嶺, 일명 태평령)의 양편 산허리에 매복하였다. 이곳은 일본 군이 왕청(汪淸) 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 는 약 1km정도의 협곡이다. 마치 을(乙)자 모양으로 굽어있는 험준한 절벽과 울창한 산림지대로 되어있 었다. 1933년 7월 3일 일본군의 본대가 이 계곡으로 들어오자 한중 연합군은 맹렬한 사격을 가하고 바위 를 굴려뜨려 적병들을 압사시켰다. 동시에 자동차와 현재 허술한 관리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청산리대첩 기념비(2020 년 10월, 연합뉴스 제공) 청산리대첩 기념비를 참배하러 올라가는 공군사관학 교 생도들(2011, 화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