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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대종교 지도자 홍암 나철의 현실 인식과 대응 43 고, 이것을 계승한 화랑을 종교의 혼이요 국수의 중 심이라고 강조했다. 이들 모두 대종교의 영향 속에 서 이와 같은 의지를 잉태시킨 것으로, 단군구국론 과 불가분의 관계였음을 상기시켜 준다. 대종교는 국내적 기반뿐만이 아니라, 1910년 북 간도(중국 연변)에 교당(敎堂)을 마련하여 항일투쟁 의 거점을 확보하고, 1911년에는 나철에 의해 파견 된 신규식에 의해 중국 상해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 발판이 구축되었다. 특히 나철은 1914년 5월 백 두산 기슭(화룡현 청파호)의 총본사를 중심으로, 동 도교구(동만주 일대와 노령·연해주 지방 관할), 서도 교구(남만주로부터 중국 산해관까지 관할), 남도교 구(한반도 전체 관할), 북도교구(북만주 일대 관할), 해외교구(중국 · 일본 및 구미 지역 관할) 등의 교구를 획정함으로써, 항일투쟁의 본산으로써의 위상을 구 축하기에 이른다. 또한 대종교가 무장투쟁의 중추로서 「대한독립선 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주도한 것이나, 대한 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주도적 역할과 함께, 그 지도 층 인물들에게 국교적 대종교관을 심어준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듯하다. 또한 대종교는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총체적 저항의 출발이자 중심이었다. 대종교는 단군신앙의 부활과 더불어, 민족 최대의 축일인 개 천절의 당위적 명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 의식을 토대로 한 민족주의역사관 확립에 중요한 계 기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전래적 인습이었던 사대 (事大)의 정신적 폐해를 공박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자 긍심을 심어줌과 함께 국권회복을 통한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분명하게 일깨웠다. 일제하 대종교의 교당 이 곧 학교이면서 항일투쟁의 전초기지였다는 삼위 일체적 인식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했다. 그러므로 일제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했던 나철의 항일투쟁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요소들을 포괄하는 정신(道, 단군사상)을 토대로 운용되었다. 그 정신(도)의 종교적 구현이 대종교 중광이요 물리 적 행동이 무장투쟁이었다. 또한 그 언어적 구현이 한글 투쟁이라면 그 역사적 노력이 중화사관과 일제 관학에 대항한 민족주의 역사학 확립이었다. 나철이 강조하는 정신을 몸통으로 하여 문화·정치·외교·종 교·무력투쟁 등을 쓰임으로 하는 총체적 항일투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는 나철을 근대 한국 지식인 저항운동사의 시조 로 평가하면서, 그의 순교(殉敎)로 인해 우리의 항일 투쟁이 들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는 평가가 이를 대 변해 준다. 또한 나철의 구월산 순교야말로 우리 민 족혁명사상 최대결정(最大結晶)이었다는 평가에서 도 확인할 수 있다. 일찍이 최남선(崔南善)이 나철의 순교를 육신제(肉身祭)로 표현하고, 이로 인해 지리 멸렬하던 민족전선이 비로소 통일된 정신적 지주 또 구심점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 이에 대한 답이 다. 필자 김동환 (사)국학연구소 설립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에 서 대종교독립운동사와 국학이론을 오랫동안 강의했다. 주요 저술로는 『종교계 의 민족운동』(공저, 2008),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 가 장도빈』(2013), 『국학과 민족주의』(공저, 2019), 『배달의 역사, 새 길을 열다』 (공동편역, 2020), 『총을 든 역사학자 김승학-그 삶과 사상』(2021), 『임오교변』 (공저, 2022), 『김교헌의 생애와 역사인식』(2023)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