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page
Special theme • 민족 독립을 위한 삶, 도산 안창호와 부인 이혜련 43 안창호와 이혜련은 35년 6개월 가 량 ‘부부’였다. 그러나 도산이 민족 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국내외로 돌 아다녔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겨우 13년 동안만 같이 살았다. 1932년 안창호는 국내로 끌려온 뒤 옥중에 서 이혜련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 가 평생에 당신에게 기쁨과 위안을 줌이 없었고, 이제 느즈막에 와서 근심과 슬픔을 주게 되오니 불안한 마음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가사와 아이들에 대한 모든 시름을 늘 혼자 맞게 하니 미안하고 미안합 니다”라고 했다. 도산이 국내에서 감옥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혜련은 남편을 대신하여 늘 그랬듯이, 집안 을 돌보며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도산과 이혜련의 결혼 도산 안창호와 부인 이혜 련은 1902년 9월 3일 결혼 식을 올렸다. 그러나 도산 이 1938년 3월 10일 서울 의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 에서 숨을 거두면서 두 사 람은 더 이상 부부로서 인 연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안창호와 이혜련은 35년 6 개월 가량 ‘부부’였다. 그렇 지만 도산이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국내외로 돌아 다녔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겨우 13년 동안만 같이 살아야만 했다. 도산이 민족독립이라는 원대한 목표와 이상을 위해 종횡무진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의 삶 모두를 바쳤 기 때문이다. 안창호와 이혜련이 처음 만난 곳은, 이혜련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서 당에서였다. 도산도 “나의 아내는 평양에 있는 나의 옛 스승의 딸이다. 내가 거기서 그녀를 보았을 때는 어린 소녀였다. 그후 내가 미션스쿨에 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서울에서 그녀를 보았다”고 하였다(『샌 프란시스코 클로니컬』 1902년 12월 7일자). 도산의 영특함을 잘 알고 있던 이혜련의 아버지는, 딸이 13살이 될 때 도산을 사위로 미리 점찍 어 두고 있었다. 1897년 안창호가 고향에 돌아와 독립협회 운동에 매진하고 있을 당 시, 이혜련의 아버지와 도산의 조부가 두 사람을 혼인시키기로 결정하 였다. 그런데, 도산은 종교가 다르고 신교육을 받지 않은 신부를 맞이할 수 없다고 혼인을 거부하였다. 도산의 혼인 거부 사유에 따라, 이혜련 의 아버지는 온 가족이 모두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혜련에게 더 이상 집 안일을 하지 못하게 한 뒤 신교육을 받게 하였다. 이로써 도산은 혜련과 『샌프란시스코 클로니컬』 1902년 12월 7일 자에 실린, 안창호와 이혜련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