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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최진동의 독립운동과 군무도독부 43 데, 그의 주요 임무가 독립군의 증강 및 독립군단체 의 통합이었다. 1919년 가을 홍범도는 북간도로 건너와 하마탕(蛤 蟆 塘)에 위치한 대한국민회의 지원을 받으며 이듬 해 3월부터 독립군단체 통합에 나섰다. 홍범도는 ‘대 한독립군 의용대장’ 자격으로 1920년 3월 8~10일에 걸쳐 독립단체 대표자 회의를 추진했으나, 통합을 달 성하지는 못했다. 이후 5월 3일, 통합에 뜻을 같이한 군무도독부, 국민회, 신민단, 군정서, 광복단, 의군단 등 6개의 독립군단체 대표들이 참석하여 연합회의 를 열고 ‘재북간도 각기관협의회’ 설립에 동의, 18개 조에 달하는 연합 방침을 채택했다. 그러나 국민회를 제외한 나머지 단체들이 국민회가 주도권을 갖는데 반대함으로써 협의회 설립도 결렬되고 말았다. 독립군단 통합에 진통을 겪는 와중에 봉오동 전투 직전인 5월 하순경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대한국민 회, 그리고 홍범도 부대가 ‘삼단연합’을 이룬 ‘대한북 로독군부’가 탄생하였다. 군무도독부와 홍범도 부대 는 독립군을 지휘, 통솔하는 군 사행동을 담당하고, 국민회는 행정 및 물자를 지원하는 민정 사무를 담당하기로 했다. 군사 적으로는 대한북로독군부장에 최진동이 오르고, 홍범도는 북 로정일제1군사령부장으로 양 분되었다. 국민회에서는 군무 위원회 안무(安武)를 최진동의 부관에 임명하는 한편, 북로독 군부 산하에 군무국도 설치하 였다. 사실 홍범도는 최진동 보다 15살 많으며 풍부한 전투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 측의 기록에 의하 면 당시에 “사람들이 홍범도를 매우 숭배하며 조선 및 간도의 지리에 밝기는 신과 같다“라며 홍범도를 신출귀몰한 경지의 인물로 평가한 바 있다. 그런 홍 범도가 최진동을 북로독군부장으로 인정한 것은 연 령 불문하고, 무장투쟁에서 최진동의 기여도와 그 부대의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대한북로독군부가 봉오동 상촌에 지휘부를 설치 하자 독립군들도 속속 봉오동에 집결하여 군무도독 부는 670명, 홍범도 부대는 안무의 부대원과 합산하 여 550명 규모의 병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때 신민 단의 60여 명 독립군도 봉오동에 주둔하였다. 이러 한 봉오동의 잘 갖추어진 여건 아래, 삼둔자 전투에 이어 봉오동 전투가 일어난 것이다. 봉오동 전투는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라는 의미에서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 지역(출처;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