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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일제의 중국 침략과 관내 한인의 동향 43 1910년 나라를 빼앗기고 35년 간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면서  한인들은 각자의 이유로 고국을 떠 나 중국 관내에 머물다가 해방을 맞 이했다.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며 준 비해온 임시정부와 미국 OSS와의  공동 국내진입작전이나 국내외 독 립운동 세력 간의 상호 연계시도 등 이 일제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실 행되지 못한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 는다. 그러나 일제가 침략했을 때부 터 패망해서 물러날 때까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제를  상대로 끊임없이 전개한 독립운동 이 있었기에 우리는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광복 78주년을 맞이하 는 오늘, 해방은 끈질기게 독립운동 을 전개하여 얻어낸 성과임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일전쟁 발발과 관내 한인사회의 동향 1931년 9월 ‘만주사변(일명 9 · 18사변)’을 일으키고 중국 동북지방을 점령한 일제는 세력 팽창을 멈추지 않고 중국 대륙을 침략했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北京) 교외 노구교(蘆溝橋)에서 일본군이 중국군과 무력 충돌을 일으켜 중국이 전면항전에 나서면서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일 본군은 중일전쟁 발발 한달 여 만인 8월에 상하이(上海)를 점령한데 이 어 12월 13일에는 중국 국민정부의 수도인 난징(南京)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 30여만 명을 학살하는 이른 바 ‘난징대학살’ 만행을 자행하기도 했다. 1930년대 초 일본군의 중국동북 침략과 대규모 공세가 이어지면서 중국 동북지방의 독립운동 기반은 와해되고 독립운동 세력 대부분은 중 국 관내로 집결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점령지역이 화북(華北) 일대를 거 쳐 중남부 해안과 중국 남부지역까지 확대됨에 따라 중국 관내(關內)에 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은 세력 보전을 위해 중국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녀야 했다. 독립운동 세력이 떠난 자리에는 일본군을 뒤따라 온 한인 들이 자리를 잡았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중국 관내지역 한인 이주가 급 증하여 1940년대 전반에는 20만 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특히 일본군 점 령지역인 중국 화북으로의 한인 이주가 크게 증가했다. 그 가운데 일본 군 점령지 내의 한인 청년들은 1938년 10월 후 중일전쟁이 장기화하면 서, 중국 관내에서 한인 무장조직이 결성될 때 주요 초모대상이 되었다. 관내 한인 독립운동 세력의 중일전쟁 대응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세계 제패를 꿈꾸던 군사강국인 일본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했다. 바로 우리 민족이 결집해 독립군을 양성했다가 일제가 미국, 중국, 소 련 등과 전쟁을 수행할 때 이들 국가들과 함께 대일전쟁을 전개함으로 써 일제가 패망한 후 연합국의 일원으로 독립을 획득한다는 것이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을 시작으로 일제의 세력 팽창을 예의주시하며 중일전쟁 발발을 예견했던 독립운동 세력은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 자 조국 독립을 쟁취할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1898~1958,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