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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말 의병과 독립전쟁 43 독립전쟁론은 일제를 몰아내고 조 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확 실한 방법은 일제와 전쟁을 결행한 다는 방략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독 립군을 양성하고 기회를 포착해 일 제와 전쟁을 전개해 독립을 달성한 다는 전략이며, 계몽운동의 실력양 성론과 의병들의 무장투쟁론이 결 합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00년 대 초 의병 참여자들은 국내에서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국외에서는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며 독립전쟁 을 추진했다. 독립전쟁론의 수립 1910년대 민족운동세력들은 식민통치라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지금 까지 전개되었던 국권회복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했다. 한말 국권회복운동은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은 같았으 나,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으로 방법과 이념상의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국망에 직면하면서 ‘독립전쟁론’으로 항일독립운동의 이념과 전술을 정 립했다. 독립전쟁론은 일제를 몰아내고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확 실한 방법은 일제와 전쟁을 결행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독립 군을 양성하고 기회를 포착해 일제와 전쟁을 전개해 독립을 달성한다는 전략이며, 계몽운동의 실력양성론과 의병들의 무장투쟁론이 결합된 방 략이었다. 따라서 한말 의병참여자들은 국내에서는 비밀단체를 조직하 고 국외에서는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며 독립전쟁을 추진했다. 자결순국 투쟁을 전개하다 1910년 8월 ‘한일강제병탄’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채응언 (蔡應彦) · 강기동 · 이진룡 · 한정만 등은 황해도 · 평안도 · 강원도의 산악지 대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지속했고, 김낙문 · 노병대(盧炳大) · 강순필 등 은 이강년 의병부대를 계승해 경북지역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915년 평안도에서 활동하던 채응언 의병장이 체포되면서 의병전쟁은 중단되었다. 상당수의 한말 의병장과 의병지도자들은 ‘한일강제병탄(‘경술국치’라 고도 함)’이 되자 자결순국 투쟁을 전개했다. 자결순국투쟁은 자기 자신 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 불의에 항거하는 것을 말한다. 순국은 가장 소극 적인 형태의 항거로 보이지만, 가장 적극적이고 강렬한 항일투쟁이었 다. 이러한 순국투쟁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이루어진 후부터 1910년 한일강제병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905년 을사 늑약이 이루어지자 민영환 · 조병세 · 송병선 등이 자결했고, 1910년 한일 강제병탄이 이루어지면서 황현(黃玹) · 홍범식 등 순국지사들이 줄을 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