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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024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대한제국기 구국계몽운동의 재조명’ 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1907년 4월 결성’ 설도 이 런 입장이다. 하지만 신민회 결성 작업은 중단됐다 가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1907년 7월 고종 (광무황제)이 강제 양위된 뒤에 재개되었다. 이는 국 민주권론에 입각한 공화제 국가를 지향하는 안창호 와 군주주권론의 틀 속에서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국내 민족운동가들이 견해차가 있었고, 44년간 재위 한 고종이 물러나고 정치적 영향력이 전혀 없는 순 종(융희황제)이 그 자리를 대신한 다음에 이런 간극 이 좁혀지고 나서야 신민회 결성이 본궤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구국운동과 개혁운동을 함께 벌여 근대국가 초석 놓은 신민회 신민회는 구국운동 조직인 동시에 당시 한국의 낙 후된 정치 ·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새 국가’, ‘신한국’, ‘유신된 자유문명국’을 건설하려는 개혁운동 단체이 기도 했다. 신민회의 결성 목적을 담은 취지서는 보 통 1909년 3월 일본 헌병대가 입수하여 일본어로 번 역한 것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어로 옮기 는 과정에서 원형이 훼손됐을 뿐 아니라 상당 분량 이 생략됐다. 그런데 미주 공립협회의 파견으로 연 해주에 간 이강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대 동공보』의 주필대리가 된 뒤에 그 신문에 연재한 「 新 韓國(신한국)을 助成(조성)랴면 新民(신민)이 되어 야 일 」 (1909년 3월 18.22.25일)이란 논설은 신민 회 취지서와 내용이 거의 같고 일본 헌병대가 번역 하지 않은 부분이 들어있다. 이는 이 논설이 이강이 갖고 있던 신민회 취지서의 원본이었을 가능성을 말 해준다. 이 논설은 “우리가 옛날에 스스로 새롭게 하지 못 함으로 악한 나무에 악한 열매를 오늘날 거두었으나 오늘날에 스스로 새로우면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를 다른 날 거둘 것”이라며 ‘진정한 유신’을 이루기 위 해서 ‘새 단체’를 만들어 국민에게 ‘새 정신’을 불어 넣고, ‘새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신민회가 주동하여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에 집단 이주한 한인들 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와 학생들의 모습. 1920년 문을 닫을 때 까지 많은 청년 장교를 배출하여 1920년대 만주 일대를 무대로 펼쳐진 무장독립운동의 산실이 됐다. 남만주 서간도 유하현 고산자의 신흥무관학교 터 추정지(경상 북 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