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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024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기획특집 ‘한국독립운동과 백두산’ 월 7일 밤에 황급히 두만강을 건너 퇴각하였다. 봉오동 전적지로 가려면 도문시에서 안산방향으 로 가서 가야하라고도 불리는 알아하( 嘎 雅河)의 다 리를 건너 삼거리를 찾으면 된다. 현재 이곳의 지명 은 향양이다. 이곳은 도문(圖們)의 상수원 보호구역 으로 댐이 만들어져 오래전에 수몰되었고 현재 봉오 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봉오동으로 들어온 일본군 의 침공 루트였던 안산과 후안산, 고려촌, 고려령은 현재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도문시 인민정부 는 1989년 6월 18일 이 일대를 ‘도문시문화유물 중 점보호지점’으로 선정하였고 1993년 6월 7일에는 ‘봉오골 반일 전적지’라는 비석을 세웠으나 관리 소 홀로 비석은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② 청산리전투 봉오동 전투의 패배에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관동 군까지 동원하는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계획을 수립 하였다. 일본의 압력을 받은 만주 군벌 장작림(張作 霖)은 1920년 7월 24일 중국군에 한국독립군의 토 벌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연길 주둔 중국군 지휘 관 맹부덕은 이 사실을 독립군에게 미리 알려주고 근거 지 이동을 종용했다. 이에 북간도 독립군부대들은 일단 산악지대로 피신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1920 년 10월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대한 신민단, 의군부, 광복단, 의민단 등의 독립군부대는 화룡현의 이도구와 삼도구(三道溝) 지역으로 모여들 었다. 일제는 만주 출병의 빌미를 잡기 위해 1920년 10 월 2일 이른바 ‘훈춘사건’을 일으켜 자국민을 살해하 고 이를 구실로 5,000여 명에 이르는 일본군 대부대 를 동원해 독립군이 집결해 있던 삼도구를 공격하였 다.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6일 새벽까 지 만 6일간에 걸처 청산리대첩이 전개되었다. 그 첫 번째는 삼도구 방면에 포진하고 있던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와 일본군 히가시지대(東支隊) 소속의 야마다 (山田) ‘토벌대’간에 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경 부터 전개된 백운평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들 은 김좌진 등의 지휘로 적을 백운평 골짜기 깊숙이 봉오동전투 현장 입구에 세워진 ‘봉오동 반일전적지 기념비’ (2011.7, 도문) 2018년 10월 24일 중국 도문시 당국에서 새로 세운 ‘봉오골(동 ) 전투기념비’(연합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