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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023년 10월 Special Theme   홍범도 장군 서거 80주년 특집 홍범도와 그의 동지들 간도 한인사회에서 최진동은 1913년경부터 두각 을 나타냈다. 당시 최진동은 북간도 한인 자치기구인 간민회(墾民會) 왕청현 분회장으로 활동하다가 1914 년에 간민회가 해체되자 장업회(獎業會)를 조직했 고, 1915년에는 왕청현 춘화사(春化社) 간민사무소 사장을 역임하며 사립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한편 최 진동은 중국 마적들의 습격에 대항하여 자위단을 조 직했는데, 1919년 3 · 1운동이후 북간도 사회의 변화 와 함께 최진동은 주변 조선인들의 자위대를 모아 ‘군무도독부’라는 이름의 독립군 부대를 편성하였다. 도독부가 있는 봉오동 주변에는 북로군정서 본부 와 사관연성소가 위치해 있었고, 석현(石峴)에는 신 민단이, 대감자(大坎子)는 광복단이 주둔해있었다. 봉오동은 동쪽으로 훈춘과 인접하여 곧장 연해주로 통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독립군에 대한 최진동 일가 의 물적 지원이 뒤따르면서 봉오동 일대는 독립군이 주둔하는 최적의 장소로 부상했다. 최진동의 도독부 역시 다른 독립군 단체와 마찬가지로 연해주에서 무 기를 사들이며 1920년 봄에는 훈 련 장을 마련하여 장정들에 대한 군사훈 련도 실시했다. 1920년 1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 부가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자 국 내외 각지에서 일본군에 대항하는 크 고 작은 전투들이 일어났다. 그해 3월 부터 봉오동에서는 두만강을 건너 국 내 온성과 종성에 소재한 일본군 헌 병 주재소를 수차례 습격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중심에서 활동했던 이 들이 최진동과 군무도독부 대원들이 다. 군무도독부 대원들은 3월 15일부터 26일까지 7 차례에 걸쳐 ‘온성군 국내진공작전’을 펼치며 일본헌 병 감시소를 습격, 전선을 끊고 시설을 파괴하였다. 일본 측에서는 이러한 최진동을 두고, “배일선인의 수령이며 귀화 선인(鮮人)으로 친중파(親中派)”라고 평가하며 그의 항일투쟁을 주목하고 있었다. 온성군 사건에 참전했던 군무도독부의 병사는 200여 명의 규모였는데, 5월 무렵 최진동이 다시 온성 진격을 추 진할 때는 500명 이상의 병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최진동과 홍범도 부대의 연합과 항일투쟁 1920년 독립전쟁 수행에 앞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간도 및 노령의 독립군단체들이 임시 정부를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 때 독립군 통합을 위해 선봉에 나선 이가 바로 홍범 도이다.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홍범도는 3 · 1운동 이 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동휘 등과 함께 독립전쟁 의 전략을 수립하며 독립군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는 1922년 초 모스크바 크렘린궁 앞에  선 홍범도 장군의 모습(출처: 홍범도 장군기념사업회)  1921년 모스크바 제1회 원동민족혁 명단체대표회에 참석한 최진동 장군 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