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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023년 3월 Special Theme 국민대표회의 100주년! 민족운동 세력의 통합과 혁신을 도모하다 창조파는 크게 세 집단으로 구성 되었다. 첫째는 1920년 중반 중 국 북경에서 신채호 · 이회영 등과 군사통일촉성회를 조직하였다가 1921년 4월 북경에서 군사통일회 의를 주도한 미주지역의 무장투쟁 론적 독립운동가 박용만과 천도교 를 대표하는 신숙과 함께한 사람 들. 둘째는 대한국민의회에서 활 동한 윤해와 원세훈 등이었다. 셋 째는 노령의 이르크츠크파 고려 공산당계의 김만겸 · 한명세 등이 었다. 창조파는 대한민국 임시정 부의 무능과 외교운동론을 비판했 다. 임시정부 조직의 부분적 개조 로는 독립운동을 이끌 수 없고, 효 율적 임시정부로 대폭개조하는 것 은 새롭게 만드는 것보다 어려우 니, 통일된 독립운동 기관을 창조 하자고 하였다. 국민대표회의에서의 창조파의 주장과 논리 1923년 1월 3일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3월 5일부터 시 국 문제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개혁 문제로 이견이 발생하였다. 3월 9일 신이진 등 19명이 임시정부의 개조안을 상 정하였다. 13일부터 안건토의가 진행되었는데 “본 국민대표회의는 대 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 헌법, 제도, 정책 및 기타 일체를 실제 운동에 적합하도록 개선할 것”이란 항목이 문제가 되었다. 이때부터 이것을 지 지하는 개조파와 새롭게 독립운동의 기관을 창조하자는 창조파의 견해 가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창조파는 크게 세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1920년 중반 중국 북경(北京)에서 신채호 · 이회영 등과 군사통일촉성회를 조직하였다가 1921년 4월 북경에서 군사통일회의를 주도한 미주지역의 무장투쟁론 적 독립운동가 박용만(朴容萬)과 천도교를 대표하는 신숙(申肅)과 함께 한 사람들이었다. 둘째는 대한국민의회에서 활동한 윤해와 원세훈 등 이었다. 셋째는 노령의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계의 김만겸·한명세 등이었다. 국민대표대회 기간 중 거행된 3 · 1절 기념식 광경 보도기사(『독립신문』1923년 3월 7일자). 국 민대표회의에 참가한 대표 일동은 1923년 3월 1일 오전 9시부터 회의장에 모여 의장 김동삼 의 사회로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신숙(申肅)이 여운형과 함께 기념사를 낭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