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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해방 전후 시기 조선독립동맹 · 조선의용군의 귀환과 동향 41 필자 염인호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 국민대학교에서 석사 ·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를 지냈으며(1997.9~2023.2), 현재 서울시립 대 학교 명예교수이다. 주요 논저로 『김원봉 연구』(창작과 비평사, 1993),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나남, 2001), 『또 하나의 한국전쟁 - 만주 조선인의 조국과 전쟁 -』 (역 사비평사, 2010) 등이 있다.  원들은 각각 남만주와 북만주, 그리고 동만주(연변)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불 안에 떨던 현지 동포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그리고 많은 동포 청년 들이 자원하여 조선의용군에 입대하 여 부대는 크게 확대되었다. 의용군 각 부대는 한국인 보호를 넘어서 중국의 국공내전(1945~1949)에 깊이 가담하 였다. 1948년 말 중국공산당의 군대가 만 주를 석권하자 한국인 부대 가운데 일 부는 만주 현지에 남았고, 또 다른 일 부는 중국관내 지방으로 진출하여 국 민당 군대와 싸웠다. 황하와 양자강을 건너 중국 인 민해방군의 일원으로 중국국민당 군대를 추격하였 고, 임무를 완성한 이후 다시 만주로 회군하였다. 대규모로 성장한 조선의용군 후신부대들은 1949 년 여름에서 1950년 봄 사이에 북한으로 들어왔고, 6 · 25전쟁 개전 초부터 북한 인민군의 일원으로 38 선 이남으로 밀고 내려왔다. “동족상잔”의 한 당사자 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만 조선의용군의 교민 보호 활동은 긍정 적인 성과도 냈다. 그 활동의 결과 일본인과 달리 한 국인(조선인, 조선족)들은 만주에서 이전처럼 삶을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특히 조선인이 다수인 연변 (간도)에서는 조선인 자치구가 성립되었다(1952년 9 월). 1955년 12월 공식 성립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에서는 한글이 공용어로 사용되었으며 한국의 문화 와 풍속이 유지되었다. 성립 당시 자치구의 주석(주 덕해), 그리고 1명의 부주석(최채)은 모두 의용군 출 신이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의 개혁개방 이 후 남한과 북한을 연결시켜주는 가교 역할을 해오기 도 하였다.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구 창립 직후의 주석 주덕해(오른쪽)와 부주석 최채 (가운데), 모두 조선의용군 출신이었다(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