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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의 분기점, 2 · 8독립선언 41 위원을 선출해 히비야[日比谷]공원 에 모였다가 16명이 검속되고 집 회는 해산되었다. 2월 23일, 조선 청년독립단은 2·8독립선언에서 요 구한 민족대회소집을 촉진하기 위 한 집회와 시위를 계획했지만 피검 (被檢)으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다 른 지역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산 발적 형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3월 19일 오사카에서 염상섭(廉相燮)이 시도한 독립선언서 배포와 시위계 획은 사전에 누설되었으나, 오사카 신문에 대서특필됨으로써 조선인 의 독립시위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 렸다. 두 번째는 재일조선인운동과의 연계성이다. 2·8 독립운동의 주역들은 귀국하거나 상하이 등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2·8독립운동을 주도한 단체는 1920년대 합법투쟁을 거쳐 1930년대 비 합법투쟁을 주도하면서 노동운동을 비롯한 대중 운동과 반일투쟁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학우회를 비롯한 조선인 단체는 1922년 니가 타현 나카쓰가와 상류의 수력발전소 공사중 조 선인 노동자 12명이 사상(死傷)한 '나카쓰가와 사 건'이 발생하자 가장 먼저 조사단(조선인학살사 건조사위원회)을 구성하고, 김약수(金若水)를 대 표로 파견했다. 노동자의 문제를 넘어 도일 조선 인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사건으로 인식했기 때 문이다. 학우회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조선 인 학살 사건이 발생한 직후인 10월 3일, 도쿄에 나카쓰가와 제1발전소에서 학살당한 조선인 시체가 떠내려왔던 자리 (2022년 10월 필자 영) 당시 조사단원 김약수 부부가 묶었던 여관 터. 현재 공터이다 (2022년 10월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