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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전쟁 원년’ 선포의 배경과 의미 41 일본군을 패퇴시켰다(봉오동 전투). 임시정부는 봉 오동 전투의 승전보를 듣고는 ‘독립전쟁의 제1회전’ 이라 칭하며 그 승리를 높이 평가했다.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원년 선포 후 처음으로 맞이한 승리였기에 더욱 빛나는 성과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임시정부는 북간도 지역 독립군 부대들 을 통일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단체들 간의 알력 다 툼, 일본군의 간도 침략에 따른 독립군 부대들의 근 거지 이동 등으로 독립군 통일운동은 끝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게다가 임시정부가 기대했던 미일전 쟁과 러일전쟁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아 일제와 전면전을 개시하려던 임시정부 의 계획은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라는 부분 적 성과만을 남긴 채 좌절되고 말았다. 임시정부의 꿈, 한국광복군 창설로 결실 이후 임시정부는 1921년 1월 이동휘가 국무총리 직을 사임한 뒤 떠나버리고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실 정이 불러온 내분으로 존립 자체가 위협 받는 지경 에 이르렀다. 청사 임대료는커녕 당장 직원들 월급 조차 지급하기 어려울 정도로 재정난 역시 극심했 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전쟁을 추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에 임시정부는 차선책으 로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 한인애국단 등을 동원한 의열투쟁에 집중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궁극적인 목표는 독립전쟁에 있었다. 독자적 군대를 조직해 우리 힘으로 일제를 몰아내자는 염원은 1940년 9월 17일 마침내 한국 광복군 창설로 이어졌다. 광복군은 태평양전쟁 당시 인도·버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공동으로 대일작전을 전개했으며, 미국 OSS(전략사무국)와 합작으로 국 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1945년 8월 해방을 맞았다. 비록 국내진공작전은 미완의 프로젝트로 끝나고 말 았지만, 1920년 이래 임시정부가 꿈꿔왔던 독립전 쟁 계획은 연합군과의 공동 작전 전개로 결실을 맺 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원년 선포가 갖 는 의미를 요약해보고자 한다. 어떤 사람은 임시정 부의 독립전쟁 원년 선포가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성급하게 추진된 방략이라고 비판하기도 한 다. 그러나 당시 임시정부는 이미 외교독립운동의 지속적인 실패로 새로운 활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또한 성과가 아주 없던 것도 아니었다. 임시정부가 추진한 독립군 통일운동으로 북간도 지역에서는 부 분적인 통합이 이뤄졌고, 그 결과 우리 독립군은 ‘독 립전쟁의 제1회전’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이 다. 무력으로써 일제를 타도하고자 했던 임시정부의 이러한 노력과 성과가 함부로 폄훼되어서는 안될 것 이다. (끝) 수원대학교 사학과·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과정을 거쳐 현재 한양 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한국근대사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주요 전 공 분야는 한국독립운동사·일제지배정책사로 특히 대한민국임시정부·북간도 지 역 항일무장투쟁·친일 밀정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무 강 문일민의 삶과 의열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 80(2022) ; 「1920년 북간도 에서의 최진동의 항일무장투쟁」,『동북아역사논총』 82(2023)이 있다. 필자 김경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