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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구국계몽운동과 신민회 41 만, 지회는 강한 반일 입장을 지속하면서 구국계몽 운동을 펼쳤다. 또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가 1907 년 말 통합한 서북학회(西北學會)는 서울뿐 아니라 연고 지역인 평안 · 함경 · 황해도에 방대한 조직을 갖 추고 교육과 언론 활동 등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 였다. 신민회 결성 시점은 ‘1907년 4월’ 아닌 ‘1908년 초’ 구국계몽운동을 이해할 때 특별히 주목해야 할 단 체가 신민회(新民會)이다. 신민회는 회원이 수백 명 밖에 되지 않았고, 더욱이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당 시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민회는 대성학교(평양), 오산학교(정주), 상동청년학원(서 울), 보창학교(강화) 등 교육 활동, 태극서관을 통한 출판 활동,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를 설립하는 실업 활동 등 독자적인 구국계몽운동을 벌였을 뿐 아니 라, 많은 회원이 대한협회나 서북학회 등에서 핵심 역할을 맡아서 크게 공헌했다. 그래서 구국계몽운동 을 다루는 책이나 논문은 대부분 신민회에 상당한 비중을 둔다. 신민회의 결성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지 만 ‘1907년 4월’이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07 년 2월 안창호가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에 양기탁·이 동휘·이동녕·신채호 등 국내의 민족운동가들을 결속 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중요 한 전거인 『이준선생전』(유자후 지음)에 역사적 사실 과 부합되지 않는 서술이 많다는 점이 밝혀졌고, 다 른 추론 근거들도 대부분 무리가 있다. 신민회의 결 성 주역인 안창호와 그의 최측근으로 미국에서 신민 회를 함께 발의했고 안창호에 뒤이어 국내로 들어와 신민회 결성 과 정에 참여한 이 강(李剛)이 훗날 남긴 진술, 신민 회 결성 참여 인 사들의 회의 참 석 가능 시기 등 을 면밀하게 검 토해보면, 안창 호의 귀국 직후 시작된 신민회 결성 작업은 1 년 가까이 지난 1908년 초에 마무리된 것을 알 수 있다. 신민회의 결성 시점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성 격 규정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보통 신민회는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구국운동 조직으로 만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대동공보』 1909년 3월 18일자 1 면에 실린 논설 「新韓國을 助成랴면 新民이 되어야 일」. 세 차례로 나누어 연재된 이 논설은 일본 헌병대가 입수해 일본어로 번역한 신민회 취지서와 내용이 거의 같고 번역하지 않은 부분이 들어있어 신민회 취지서의 원본으로 추정된다. 『신흥교우보』 제2호(1913.9.15, 독립 기념관 제공). ‘신흥강습소’ 졸업생 및 재 학생들의 조직인 ‘신흥교우단’의 기관지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