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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대종교 지도자 홍암 나철의 현실 인식과 대응 41 한 배경을 알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나철은 동 학의 최제우나 증산교의 강일순처럼 화려한 창교 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 었다. 1905년 백봉집단의 단군교에 입교한 일개 교 인으로서, 단군신앙의 연 결자로 스스로를 낮추었 던 것이다. 한편 나철에 있어 대종 교 중광은 그 개인에서는 과거의 족쇄였던 유교적 자아의 껍질을 벗고 민족 적 자아로 변모하는 것이 었다. 또한 민족적으로는 단절되었던 민족문화의 거대한 줄기를 세우는 역사 (役事)이기도 했다. 마침내 나철은 1909년 음력 1월 15일, 오기호·최전(崔顓)·류근(柳瑾)·정훈모·이기·김 인식(金寅植)·김윤식 등,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과 더 불어 『단군교포명서』를 선포하고 단군신앙을 다시 일으킨다. 이것이 대종교의 중광이다. 대종교의 중광은 절망적 현실 속에서 민족적 자긍 심을 북돋워 준 일대사건으로, 우리 민족사의 전반 에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온다. 역사 속에 침잠되어 오던 단군신앙의 부활을 통해, 당시 주권을 잃어버 린 암울한 민족사회 전반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 다. 또한 민족정체성의 와해 속에서 방황하던 수많 은 우국지사들과 동포들에게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 하게 된다. 특히 『단군교포명서』에 나타나는 바와 같 이, ‘국망(國亡)’이라는 수모를 당하게 된 역사 적 원 인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함께 ‘도존(道存)’이라는 정 신적 일체감을 통한 치유방안을 동시에 제시함으로 써, 한민족 정체성 부활의 당위적 방향을 제공했다 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현실 대응 –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하다 대종교의 중광은 한민족 근대정체성 확립과 표리 관계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근대정체성의 핵심 가 치인 국시(國是·홍익인간), 국전(國典·개천절), 그리 고 국기(國紀·단군기원) 등이 대종교에서 파생된 것 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국교(國敎) 관념이나 한 글 정착, 그리고 중화사관과 일제관학에 맞서 우리 의 역사학을 개척한 집단도 대종교다. 한마디로 ‘대 대종교 중광의 헌장이라 할 수 있는 『단군교포 명서』의 표지 나철(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순교를 결심하고  김두봉을 비롯한 6명의 제자들과 함께 구월산행 에 나선 1916년 8월 5일(음력), 황해도 사리원 역 앞 사진관에서 마지막으로 찍은 기념사진(이 상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