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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위태로울 때에 충신과 열사가 나와 민족의 지남이 되고 길이 청사에 전해져서 후세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고려가 위란하고 조선이 개국하려고 하는 때에 대부분의 고려 신하들이 조선 태조에게 충성하였으나 문충공 포은 정몽주 공은 고려의 동량이며 동국 성리학의 비조로서 일신의 영화를 마다하고 절조를 굳게 지켜 선죽교에서 유명을 달리하였기에 지금까지 충신으로 칭송하며 기리고 있다. 죽교 정래영 선생은 바로 포은공의 19세손으로 아호의 유래도 문충공의 일에 기인한 듯 하다. 예로부터 충현의 선조가 있으면 충현의 자손이 있는 것은 정리이니 선생이 걸어온 생애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선생은 우용의 아들로 광무3년 서기 1899년 기해 정월 19일 경주시 감포읍 팔조리 홍덕마을에서 출생하였으니 관향은 영일 자는 무범이며 호는 죽교이다. 선생은 타고난 성품이 강직 활달하였고 총명한 자질을 지녔으나 항상 면려하여 일신의 지경을 추구하였다. 어려서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여서 격물치지하는 깊은 의지에 이르렀으나 만족하지 않고 개화기를 맞이하여 신학문을 배워 민족을 깨우치고자 결심하고 상경하여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 이때에 학문을 연마하는 한편 애국심을 고취하였으며 민족의 자주독립을 가슴에 품었고 정규과정을 모두 마치고 졸업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이바지하였다. 1919년 간악한 일제에 항거하는 기미독립항쟁이 전국에서 불길처럼 일어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