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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안성지역 3 · 1운동과 특징 41 ③ 구 죽산군(이죽면, 일죽면, 삼죽면) 구 죽산군 지역에서는 4월에 만세운동이 일어났 다. 4월 1일에 이죽면 죽산리의 죽산공립보통학교 학생 50여 명은 교정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같은 날 이죽면 두현리에서 도로 수선 부역에 동원되 었던 인부들 사이에서 독립만세를 부르자는 선동이 있었고, 이죽면 장계리 주민 수백 명이 죽산리의 경 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만세를 외쳤다. 이튿날인 4월 2일 오전부터 4월 3일 새벽까지 죽 산시장에서는 대규모 만세운동이 벌어져 죽산리 중 심가를 뒤흔들었다. 이죽면 장원리, 매산리, 용설리, 장계리 등지에서 모여든 주민 수천 명이 죽산리 죽 산시장 일대에 모여들어 만세를 불렀다. 군중은 죽 산경찰관주재소, 죽산우편소, 이죽면사무소, 죽산공 립보통학교 등을 돌면서 시위를 벌였다. 죽산공립보 통학교 학생 수십 명도 태극기를 앞세우고 죽산시 장, 죽산경찰관주재소로 가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 다. 시위대는 오후 4시에 일단 해산했는데, 밤 8시경 에 다시 2천 명이 죽산시장에 모여 죽산리 일대를 돌 며 시위를 벌이다가 3일 새벽 1시에 해산했다. 새벽 5시경에는 삼죽면 덕산리 방면에서 백여 명 군중이 만세를 외치면서 이죽면사무소로 몰려왔다. 안성에 서 온 보병 79연대 군인들이 경관과 함께 진압에 나 섰는데 죽산리 입구에서 군중과 충돌해서 시위대 중 3명이 사망하고 8명이 다쳤다. 일죽면에서는 4월 2일 밤에 주천리 시장에서 약 2 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른 뒤 주천경찰관주재소, 일 죽면사무소 앞으로 이동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 다. 일죽면 장암리의 구장인 곽대용은 주민들과 함 께 주천리로 몰려가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 를 외쳤고, 일죽면 월정리 주민 약 백 명도 주천경찰 관주재소로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군중은 함 성을 지르며 기와와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쉈다. 삼죽면에서는 4월 3일에 율곡리의 면사무소에 약 3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다가 경관의 발포로 해산 했는데, 그 과정에서 2명이 죽고 5명이 다쳤다. 안성지역 3 · 1운동의 특징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안성에서는 안성읍내 뿐 만 아니라 구 양성군, 구 죽산군에서도 수십에서 수 천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그중에서 도 4월 1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 사이에 있었던 원 곡 · 양성 만세시위는 두 지역을 오가며 경찰관주재소 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 일제 관서를 공격하는 등 공 격적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점에서 특별히 주 목받아왔다. 그런 한편으로 기독교나 천도교 등 종 교계의 개입이 뚜렷하지 않은 점, 안성읍내, 양성면 과 원곡면, 죽산지역의 만세운동이 각각 서로 다른 특징을 보였다는 점, 원곡 · 양성 만세시위는 마을공 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민중의 자발적 연대가 최고조 로 고양된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특징은 일제가 양성군과 죽산 군을 안성군에 강제로 통폐합시켰지만, 주민들 사이 의 이질적인 지역 소속감까지 없어지지 않았다는 사 실이다. 세 지역은 주도층, 시위 군중의 동원 방식, 주된 참여자층 등에서 뚜렷한 차이가 드러난다. 안성읍내의 만세시위는 기본적으로 시장을 중심 으로 생업을 꾸려가는 다양한 민중이 참여하여 발전 했다. 체포된 사람들도 농민보다는 생선장수, 주막, 자전거 수선업자, 망건상, 미곡상, 신발장수, 날품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