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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신간회의 ‘민족동권(民族同權)’ 운동 전개와 쇠퇴 41 1927년 2월 창립대회된 신간회는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연 합한 민족유일당 형태였다. 복수의 정치세력들을 아우른 독특한 형태 였다. 신간회의 강령은 “①우리는 정치·경제적 각성을 촉구한다, ②우 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③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였다. 신간회는 식민지배 체제 내에 적응 하려는 민중의 욕망을 받아들이면 서도 식민 지배 체제를 부정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식민지배 체 제의 경계에 있었던 신간회가 제기 한 사회적 의제는 ‘민족동권(民族 同權)’이었다. 민족동권은 지배민족 이든 약소민족이든 동등한 법적 권 리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결국 신간회 해소운동의 실패는 취약한 신간회 내적 역량의 반영이었다. 신간회 창립의 배경 1927년 2월 15일 창립대회를 통해 본부 진용을 갖춘 신간회(新幹會) 는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한 민족유일당 형태였다. 하나 의 당은 하나의 정치이념을 대변한다. 그러나 신간회는 복수의 정치세 력들을 아우른 독특한 형태였다. 이와 같은 특수한 형태는 1920년대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1919년 세계혁명을 위해 조직된 국제공산당 코민테른은 1920년 제2차 대회 이래 식민지·약소민족의 해방 운동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민 족 해방을 위해 싸우는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동은 코민테른의 중요한 정책이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고 중국공산당의 당원들은 개인자격으로 중국국민당에 입당했다. 국공합작을 통한 국민 당의 투쟁은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왔다. 국민당의 ‘북벌(北伐)’은 성공 적이었고 중국 혁명의 진전은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이에 따라 중국국 민당 형식의 민족유일당 운동은 시대의 흐름이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운동의 정착으로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경 쟁 속에서도 민족 문제의 해결을 위한 협동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이와 같은 내외적 배경 속에서 우리 민족운동 전선 내에서는 민족유 일당 운동이 시작되었다. 민족유일당 운동은 중국 관내(關內)에서 시작 되어 만주(滿洲, 중국 동북지방)로 확산되었고, 국내에서는 신간회 창립 으로 귀결되었다. 신간회 창립대회 상황과 결과를 보도한 1927년 2월 16일 자 조선일보 기사(오른쪽)와 2월 17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창립대회장 모습(조선일보 제공). 창립대회에 1,000여명이 참가했고, 조선일보 사 장 이상재를 회장으로 선출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