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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동대학살 41 려진 것은 ‘6,661’명이다. 그 근거가 바로 1923년 12 월 5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일만의 희생자」라는 기사이다. 연구자 야마다 쇼지(山田昭次)에 따르면 이 기사는 ‘본사 피학살 교일(僑日)동포 특파조사원 제1신’을 바탕으로 구성한 것으로, 특파조사원이란 당시 나고야에 있던 한세복(韓世復)이라고 한다. 1923년 10월 1일 결성된 ‘재동경(在東京) 이재(罹 災)조선동포위문반’은 약 세 달간 피해 조선인에 대 한 ‘위문’을 명분으로 조선인의 피해사실을 조사하 고 다녔던 단체이다. 이 조직에 참여한 한세복이 재 동경이재조선동포위문반의 활동을 바탕으로 작성 된 보고서를 당시 『독립신문』 사장이었던 김승학에 게 전달했고, 그 결과가 「일만의 희생자」라는 기사로 보도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기사에 실린 ‘6,661 명’은 조선인 피학살자 수에 관한 여러 자료 가운데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100년전 임시정부 요구사항 여전히 유효 임시정부와 『독립신문』은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조선인 학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들은 무차별한 폭력에 희생된 동포의 비극에 침묵하지 않 았다. 국가 차 원의 외교적 대응, 구체적 인 독립운동 계획 수립, 사 건에 대한 규 명과 보도 등 다양한 방식 의 움직임을 펼쳐나갔다. 그동안 한·일 양국의 시민사회는 오랜 시간 관동대학살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노 력을 펼쳐왔다. 그러나 현재까지 한국 정부는 100년 이 지난 지금까지 이 사건에 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적인 답변과 사과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 는 여전히 조선인 학살의 책임을 자경단에게 전가하 며, 국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100년전 임시정부의 요구사항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최근 일본에서 출판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진상규명 관련 도서들 필자 김강산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한국근대사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근대사에서 발 생한 다양한 폭력과 학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일본의 관동대학살 사건 에 대한 조선인의 대응을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 중이다. 연구 논문으로 「관 동대학살에 대한 조선인들의 인식과 대응-사건 이후 조선에서 결성된 단체를 중 심으로」(『사림』 60, 2017), 「관동대학살에 대한 재일본조선인의 대응-재동경이 재조선동포위문반을 중심으로」(『한국독립운동사연구』 75. 2021), 「관동대학살에  대해 해외 조선인이 생산한 문건과 그 성격」(『동국사학』 74, 2022), 「제노사이드 의 관점으로 본 관동대학살」(『한국독립운동사연구』 81, 2023)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