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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25년 2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2 · 8독립선언을 다시 본다’ 합법적 형태의 유학생단체에서 유학생들은 친목 회나 월례회, 각종 환영회 등을 계기로 결속력을 강 화하고, 운동의 토대로 활용했다. 비록 공개적인 석 상에서 국권 회복을 부르짖고 대중투쟁을 펼칠 수는 없었으나, 1917년 후반부터 본격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학우회 기관지 『학지광(學之光)』 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합법적 단체 외에 열지(裂指)동맹과 신아(新亞)동 맹당 등 비밀결사도 존재했다. 열지동맹은 학우회의 회장을 지낸 정노식을 비롯해 김철수(金 錣 洙, 전북 부안) 등 유학생 7명이 1915년에 결성한 비밀결사로 써 신아동맹당의 전신이다. 신아동맹당은 한‧중‧ 일‧베트남 등 유학생들과 국제 연대의 성격을 띤 국제적 비밀결사였다. 당원들은 모두 학우회 임원 을 겸했다. 이들은 당국이 지정한 금서를 상하이[上 海]에서 조선으로 밀반입 배포, 집회 연설, 각종 단체 조직,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했다. 김효석과 장덕 수 는 1915년과 1917년에 신채호의 『한국통사』 표제 를 『세계근사(世界近史)』로 가장해 밀반입한 후 배포 했다. 신아동맹당원들은 여러 지역 청년들과 연대를 위해 인도, 상하이, 싱가포르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 히려 했으나, 공안 당국의 감시와 압박 속에 비합법 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1917년 9월 해산했다. 3·1운동의 기폭제이자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의 분기점이 된 2·8독립운동 식민지시기 대표적인 항일투쟁이자 비폭력 평화 운동으로 세계 역사에 영향을 미친 투쟁은 3·1운동 이지만, 3·1운동의 기폭제는 2·8 독립운동이었다. 2·8 독립운동은 재일조선인운동사 속에서 독자적인 내용을 갖고 전개한 반일운동이었다. 2·8독립운동 주체가 지향한 이념과 활동은 향후 재일조선인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첫번째 영향은 지속성이다. 2·8 독립운동 직후인 2월 12일 일본 제 국의회에 독립청원을 하기 위해 이달(李達) 등 후임 학우회 기관지 『학지광』 제12호 표지 (독립기념관 제공) 열지동맹의 주요 구성원 김철수 (1893~1986, 국가보훈부 제공). 그는 후일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