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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25년 1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독립운동의 목표와 방법론 재조명’ 적에 등록할 것을 명령하고, 1920년 3월 20일 제1회 국민군 편성식을 가졌다. 또 국내에서의 군인 모집 을 위해 임시군사주비단(臨時軍事籌備團)과 의용단 (義勇團)을 동원했다. 한편 임시정부는 3 · 1운동 이후 만주(중국 동북지 방) 지역에서 조직된 독립군 부대들을 임시정부의 지휘를 받는 단일한 독립군단으로 통일하고자 했 다. 이 당시 서간도 지역에는 군정부(軍政府)가 있었 는데, 1919년 11월 무렵 임시정부 산하 기관으로의 편입을 결정하고 서로군정서 (西路軍政署)로 명칭을 변경한 바 있다. 북 간도(중국 연변) 지역의 ‘대한군정부’도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로 개편되 었다. 다음으로 임시정부는 북간도 지역에도 특파원들을 보내 독립군 통합을 지시했 다. 당시 북간도 지역에는 종교·이념·계급· 출신지역 등이 제각각인 독립군 단체들이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 시정부가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하고 북간도 지역 독립군 단체들의 통일을 추진하자, 독립군 단체들 역시 이 에 호응하여 통합 논의를 본격적으로 이 어가기 시작했다. 북간도 지역 단체들 역 시 대규모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단체들을 통합하거 나 연합시켜 강대한 부대로 재편성할 필 요성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지속적인 통합 논의 끝에 우선 봉오동을 근거지로 하고 있던 최진동(崔振東)의 대한군무도독 부(大韓軍務都督府)와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 안무(安武)의 국민회 군무위원회(軍務委員會)가 연합 하여 1920년 5월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가 출범했다. 대한북로독군부 출범 직후인 1920년 6월 7일 일 본군 월강추격대(越江追擊隊)와 남양수비대가 독립 군을 탄압하기 위해 봉오동 골짜기로 침입해왔다. 북로독군부와 신민단 등 독립군 부대들은 분전 끝에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한국광복군 대원들의 미군 OSS(전략사무국) 교관에 의한 총기훈련 광경(이상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