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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24년 11월 Special Theme  11 · 3(광주)학생독립운동 제95주년 특집 ‘11 · 3(광주)학생독립운동을 다시 본다’  태극단은 민족자결이론을 바탕으로 민족의식 고 취, 전국적 조직 등을 기본목표로 하고 다음 세가지 행동노선도 정했다. ①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 이더 연구, 폭발물제조 등 군사학 연구에 더욱 힘쓴 다. ② 재정안정을 위하여 각자의 재산을 각출하고 각처의 우국지사에게 지원을 받는다. ③ 우 국선배의 지도를 존 중하며 전국적인 학 교 및 지역별 동지조 직이 완성되는 때에 는 내외의 여론을 환 기하고 일본제국주 의에 대한 조직적인 항쟁을 전개한다. 국 내투쟁이 불가능한 상황이면 중국으로 망명하여 계 속 투쟁한다. 나이 어린 학생들 조직으로는 매우 대 담하면서도 선진적 구상을 실천하려 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제의 탄압(심문과 판결) 1943년 5월 9일 결단식을 거행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밀고로 5월 23일 이상호 단장이 대 구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잔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조직과 단원에 대한 내용을 얻지 못한 일본 경찰은 이상호 단장의 집을 샅샅이 수색 하여 천장에 숨겨 둔 문서를 발견했다. 이틀 후인 5 월 25일 수업중인 김상길, 서상교 등 9명의 간부단 원들을 체포하고 다시 이틀 후인 5월 27일 나머지 단원과 준단원 전원이 체포되었다. 이들 중 16명은 25일간의 불법감금 후 풀려 났지만, 간부급 10명은 모진 고문 속에서 계속 수사를 받았다. 계속되는 심 문과 고문으로 피체 후 몇 달 되지 않아 이준윤이 급 성늑막염으로 사망하였고(1943년 10월 2일 순국), 같은 해 10월 11일 대구경찰서에서 수사 받던 9명이 1930년대 말 대구상업학교 학생들이 일본 군사교관에게 실전같은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영남일보 제공).  대구상업정보고등학교 총통창회에서 2001년에 간행한  『태극단학생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