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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24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대한제국기 구국계몽운동의 재조명’ 국계몽운동으로 묶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당시 용 어를 살려서 ‘자강운동’으로 부르자는 의견도 제기 됐다(박찬승). 구국계몽운동은 교육·실업·언론·종교 활동이 중심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서 범위와 평가는 조금씩 달라지지만, 대한제국 후기의 구국계몽운동에 포함 되는 것은 대체로 교육·실업·언론·종교 활동이다. 전 국 각 지역에서 유지들이 중심이 돼 3000개가 넘은 근대식 초·중등학교가 설립됐고, 보성전문학교(서 울)와 숭실전문학교(평양) 등 고등교육기관도 세워 졌다. 이들 교육기관에서는 구국계몽운동가들이 만 든 국어·국사 교과서로 구국 정신을 불 어넣었다. 또 회사와 공장, 농회(農會) 와 농장 등을 설립하여 근대산업을 진 흥하고 민족경제를 건설하려는 움직 임이 일어났고, 일본에서 도입한 막대 한 차관을 국민의 손으로 갚자는 국채 보상운동이 1907년 2월 시작돼 전국으 로 확산됐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 · 황 성신문 · 제국신문 · 만세보·대한민보 등 의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 대한협회회 보 · 서우 · 서북학회월보 · 기호흥학회월 보 · 호남학보 · 교남교육회잡지 · 소년 · 가 뎡잡지 등 잡지는 국내외 정세를 알리 고 근대 지식을 보급하는 계몽 활동을 벌였다. 한편 1860년대 이래 민중 속으로 퍼 져간 동학이 1905년 말 천도교로 이름 을 바꾸고 근대 민족종교로서 공식적 활동을 시작했고, 1909년 초에는 한민족 고유의 단 군 신앙을 근대종교의 틀로 재탄생시킨 단군교(일본 의 한국 강제병합 후 대종교로 개칭)가 ‘중광(重光)’ 을 선포했다. 구국계몽운동을 주도한 것은 보안회 · 국민교육 회 · 공진회 · 헌정연구회 · 대한자강회 · 대한협회 등 정 치 · 사회단체와 서우학회 · 한북흥학회 · 호남학회 · 기 호흥학회 · 교남교육회 · 관동학회 등 출신 지역별로 만들어진 학회였다.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는 전국 에 지회를 설치하여 지역 차원의 구국계몽운동을 이 끌었다. 대한협회의 경우 중앙의 지도부는 점차 정 치활동에 치중하면서 반일(反日)의 색채가 흐려졌지 신민회가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 건물 앞에 모인 교사와 학생들(독립기념관 제 공). 대성학교는 안창호가 대판(代辦, 대리)교장으로 학생들을 직접 지도했다. 신민회의 주역들: 왼쪽부터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