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page

40 2024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기획특집 ‘한국독립운동과 백두산’ 러 생각에 잠기게 된다. 용정의 또 하나의 명물은 대포의 포신처럼 생겼다 고 하여 ‘대포산’이라 부르는 비암산 왼쪽에 우뚝 솟 아있는 거대한 바위산이다. 이 바위는 용정의 일본 총영사관을 향해서 대포가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보 여 강폭한 일제에 저항하던 당시 한인들에게는 정신 적인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마저도 간과 하지 않고 1941년 일제가 포신에 해당하는 바위를 폭파해 날려버렸다고 한다. 1919년 3 · 13 항일시위는 용정의 서전대야(瑞甸 大野)에서 거행되었다. 과거에는 넓은 벌판이었는데 현재 이곳에는 용정 제1유치원과 마당이 자리하고 있다. 3 · 13의거 당시, 용정시는 물론 200리 바깥에 떨어진 벽촌에서까지 3만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독립시위를 전개하였다. 당시 용정에 거주하는 800 여 호 한인들의 집집은 모두 태극기를 내걸었고 상 점들은 문을 열지 않았다. 서전벌판의 군중은 대형 태극기와 정의 · 인도 · 대한독립이라고 쓴 커다란 깃 발을 세우고 손에 손에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원형 으로 모여들었다. 지금은 소방서로 사용되고 있는 그 당시 천 주교 성당의 종루에서 정오의 타종이 울리자 이를 신호로 김영학은 개막을 선언하고 「 독립선언 포고문」 을 낭 독하였다. 그 후 배형식, 유예균 등과 황지영 여사의 연설로 군중의 열기는 고조되었다. 명동학교와 창 동학교, 정동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충렬대원 320명 을 선두로 시위대는 ‘대한독립’이라고 쓴 대형 깃발 을 앞세우고 간도일본총영사관을 향해 만세시위 행 진을 했다. 시위대가 오층대 앞을 지날 때 일제의 사 주를 받은 맹부덕(孟富德)의 중국군 총격을 받아 기 수인 공덕흡 · 박상진 · 김태균 · 정시익 등 18명이 시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여기에 30여명이 부상을 입었 다. 부상자들은 영국데기에 있는 제창병원으로 호송 하였는데, 그 후 사망자가 더 늘어나 모두 19명이 순 국했다. 3월 17일 용정의 각계 인사들과 3천여 명의 애국 청년들이 모여 제창병원 마당에서 순국한 열사들의 발인제를 지냈다. 합성리 공동묘지까지 운구하여 장 비암산에서 바라본 일송정. 뒤로 말발굽산과 마안산이 보인다 (2007.5, 용정).  일제가 폭파하고 남아있는 대포산의 바위(2006.8, 용정)